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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25)내가 남을 돕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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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25)내가 남을 돕는 이유

입력
2002.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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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수록 암이란 게 참 고약한 병인 것 같다.아침에 먹은 된장국이 맛있어서 점심때 그대로 데워 먹으려면 이상하게 짜고 맛이 없어진다.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아내가 내놓아도 “이런 것을 누가 먹느냐?”고 화를 낼 때가 많다.

이런 몸의 변화가 나와 가족을 지치게 한다.

전에 들은 스님 이야기가 맞다. 가족은 병간호를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멀리 떨어져 간호를 해야 한다.

오늘은 ‘한(恨) 풀이’에 대해 쓰고 싶다. 몸이 아플수록 이상하게 힘들게 살아온 지난 삶이 많이 생각난다.

‘보조MC 주제에 주연 배우를 소개했다’는 이유로 쇼 단장에게 발길질을 당한 일, 300원짜리 완행열차를 타고 울며불며 서울로 올라온 일….

나는 그 한 맺힌 삶을 어떤 식으로 잊으려 했을까.

“너, 나 괴롭혔으니까 그대로 당해봐라”는 식이었을까.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나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았다.

1960년대만 해도 내가 감히 소개할 수조차 없었던 그 ‘주연 배우’에 대한 사연이다.

아직 살아계신 분이니까 이름은 밝힐 수 없다. 나중에 내가 유명해져서 서울구락부에 출연하고 있던 어느날 사장인 최봉호(崔奉鎬)씨에게 부탁했다.

“그 사람 한번 씁시다.” 최씨는 “누가 지금 그 따위 퇴물을 쓰느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통사정했다. 출연료는 내가 내겠다고도 했다. 결국 그 노(老)가수는 이유도 모른 채 오랜만에 무대에 섰고 기쁘게 노래를 불렀다.

이런 식이다. 나는 내 한과 가슴의 상처를 일종의 보은(報恩)으로 치료해왔다.

내게 발길질을 해댔던 그 쇼 단장에게도 나중에는 해마다 아이들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줬다.

그 집 아이들은 “그 유명한 이주일 아저씨가 우리 집에 이런 돈을 줘요?”라며 깜짝 놀랐다.

내가 1984년 1월 독립투사 이우석(李雨錫ㆍ당시 88세)옹을 수양아버지로 모신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약 한 첩 못 써보고 돌아가신 아버지(정명수ㆍ鄭命壽ㆍ1970년 작고)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딴따라 하려면 아버지와 인연을 끊자”는 말까지 들어가며 매몰차게 내쫓긴 서러움 때문이기도 했다.

1983년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1,000만원을 내놓은 일, 1992년 LA 흑인폭동 때 큰 피해를 입은 현지 한인방송 라디오 코리아에 2억원을 내놓은 일도 내 나름의 한풀이였다.

배고파서 축구를 그만 둔 서러움, 상계동 셋방시절 물난리 때문에 아내와 부둥켜안고 울어야 했던 그 한을 보란 듯이 풀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나를 언제나 이용만 했다. 1981년 서울 대치동에 처음으로 마련한 2층짜리 양옥집.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집주인만 믿고 덜컥 그 집을 사버렸다. 대지 80평에 건평 60평, 당시 3,500만원짜리 고급 주택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집 주인은 땅 사기꾼이었고, 대지는 이미 서울시에 넘어간 뒤였다.

이후에도 나는 수많은 사기를 당했다. 불과 며칠 전에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후배에게 당했다.

워낙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내게 1억원 상당의 재산피해를 입힌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당신이 암 걸린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야?” 주위 친구들은 “원래 그런 놈이니 잊어버리라”고 말하지만, 나는 또 한번 쉽게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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