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美·뉴질랜드… 지금은 독일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 머물러
외환위기 때 삶에 염증 느껴 훌쩍
양말 장사, 콘테이너 잡부 등 막일
"돈보다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 소중… 어리석어 보여도 편하고 행복해요"
“여행이 목표가 아니라 시간과 삶을 공유하는 게 목표입니다.”
17년째 두 자녀와 함께 세계 곳곳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살고 있는 김현성(45), 남혜용(47)씨 부부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으리으리한 집도 번듯한 직장도 없이 떠돌이처럼 사는데도 이들은 “행복하다”고 했다. 아들 김진(19)군과 김슬(16)양도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삶의 만족도 순위에서 최하위권이라는 한국을 떠난 이 가족은 어떻게 행복을 찾았을까. 재독간호사들이 베를린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호스피스 단체 ‘동행’ 후원금을 모금하기 위해 잠시 독일에서 귀국한 부부를 20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김현성씨 가족은 ‘주거형 여행’을 하고 있다. 멕시코를 시작으로 미국, 중국, 뉴질랜드, 일본, 독일까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을 살았다. 오대양 육대주를 몇 차례나 돌고 또 돌았을 시간이지만 이 가족이 여행한 나라는 아직 30개국도 안 된다.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돌고 방문한 도시의 수를 늘리는 데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스스로를 “인생사냥꾼”이라고 칭하며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모으면서 내 삶이 풍부해지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형 보험회사에 다닐 때만 해도 김씨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의 삶을 바꿔놓은 건 1998년 외환위기였다. 구조조정 대상도 아니었지만 한국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껴 사표를 내고 멕시코로 향했다. 언어가 통하는 나라를 우선으로 찾은 결과였다.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함께 전공한 아내와 단돈 300달러만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시작은 양말 노점 장사였다. “트럭에 양말을 싣고 떠돌이 장사를 했습니다. 멀리 갈 땐 2, 3주 집에 못 들어가기도 했어요. 하루는 새벽 5시에 들어와 누워 자려는데 어린 아들이 제 볼에 뽀뽀를 해주더군요. 내가 뭐하고 사는 건가 싶었죠. 가족과 함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2001년 미국으로 건너 가선 일급 50달러의 콘테이너 잡부로 일했다. 아내 남씨는 청바지 회사에 취직했다. 남씨가 다니던 청바지 회사가 급성장하고 김씨도 창고 총감독이 되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김씨는 “아메리칸 드림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고 했다. 이사 갈 집과 새로 살 차를 알아보러 다니던 중 김씨는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은행 대출을 받아 집과 차를 사면 목에 개줄을 달게 되는 것 같더군요. 밤 늦게까지 일해야 할 테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도 줄어들 거라 생각하니 겁이 나고 두려웠습니다. 영주권을 포기하자고 아내에게 말했죠. 그 때문에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5년여간 고생한 끝에 얻은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부부는 두 아이와 함께 또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김씨는 “영주권에 연봉이 10만달러나 되는 직업까지 버리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고 회상했다. 가족은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했다. 한 대륙에 한 나라씩 여행을 다니는 게 이들의 목표였다. 대륙을 옮겨 다니는 사이엔 몇 개월간 한국에서 지내며 향수를 달래고 아이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익히는 시간을 줬다. 남씨는 “집에서만은 한국어를 쓰게 한다”며 “영어가 더 익숙했던 둘째는 우리말을 안 배우려 한 적도 있어 어렵게 가르쳤다”고 말했다.
2007년 중국으로 떠난 가족은 남반구를 탐험하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짐을 싸 뉴질랜드로 향했다. 지루할 만큼 평온한 나라에서 2년 넘게 살던 부부는 애니메이션에 빠져 일본에 가고 싶다는 아이들의 말에 고민도 없이 오사카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3년 전 스페인으로 가려던 계획이 틀어져 자리를 잡은 것이 베를린이다. 네 가족이 살려면 적잖은 생활비가 들 것 같지만 남씨는 “교육비가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주거비와 식비 정도만 쓴다”며 “이사할 땐 짐가방과 배낭 하나씩만 들고 다닌다”고 말했다.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아이들도 단단해져 갔다. 독일에서 보낼 아이들의 낯선 학교생활을 걱정하던 김씨에게 딸 김슬양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걱정 마,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남씨는 “어린 나이부터 돌아 다녀서인지 ‘내가 있는 환경에 적응해야겠다’고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 7개 언어를 구사한다. 그 중 5개국어는 현지인 수준이다. 하지만 김씨는 “전혀 자랑할 일이 아니다”고 했다. “외국어 실력 늘리려고 돌아다닌 게 아닙니다. 아이들에게도 언어는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일 뿐 그걸 자랑하고 다니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김현성씨는 “일을 안 하고 놀기 위해서 돈을 번다”고 했다. 가족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돈을 번다는 것이다. 그는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을 위해 지금 불행하게 살지 말고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들이 방황하지 않았던 것도 부부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소통했기 때문이었다. “돈, 명예, 권력, 승진 같은 것 그리고 가족과 함께 보내는 삶 사이에 저희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이렇게 사는 게 굉장히 편하고 행복합니다. 가족과 여행하는 것이 청년 시기의 꿈이었는데 그걸 이뤘으니 이제 세상을 다니며 보고 배운 것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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