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됐다. 부당한 권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는 투표 참여 의원 299명 중 234명 찬성이라는 압도적 결과로 나타났다. 매주 토요일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넘실거렸던 촛불의 파도와 청와대를 에워싼 분노의 외침이 이뤄낸 성과다. 한국 사회는 지금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가고 있다.
훼손된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시민들은 소중한 ‘승리의 경험’을 얻었다. 그리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역사의 주인은 민중과 시민임을 다시 확인했다.
불의에 맞서 함께 뜻을 모을 때 더 커지는 촛불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들을 골랐다. 100만 촛불을 울린 양희은의 노래 ‘상록수’에 나오는 가사로 이 영화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대신한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브이 포 벤데타’(2006)
10년 전에도 극찬 받았지만 최순실 게이트 이후 영화팬들 사이에 재조명 되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가 담아낸 정치 혁명과 시민 불복종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영화의 배경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후의 2040년 영국이다. 그곳은 겉으로 질서정연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다. 시민은 일상적인 감시 속에 살아가고, 미디어는 왜곡된 메시지만을 전달한다. 자신이 억압돼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앞에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정체 불명의 사나이 V가 나타난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 제임스 1세 정부의 독재에 맞서 의회 폭파를 시도하다 처형된 실존인물이다. 혁명을 꿈꾸는 V는 시민을 깨워 권력의 폭압에 저항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이 영화는 주옥 같은 명대사로도 유명하다. 특히 현 시국과 관련해 되새겨볼 만한 대사들이 많다. “예술가는 진실을 말하기 위해 거짓을 사용하는 반면 정치인은 진실을 덮기 위해 거짓을 사용한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서는 안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지.”
영화는 약속의 날인 11월 5일 의회 앞에 모인 시민들이 가면을 벗고 의회가 폭파되는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에서 끝을 맺는다. 실제로 ‘가이 포크스 데이’라 불리는 11월 5일, 광화문에선 촛불집회가 열렸다.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 중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사람들도 있었다. 이 가면은 저항과 혁명을 상징한다. 촛불도 저항과 혁명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카트’(2014)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를 그렸다. 개봉 당시 비정규직 노동 문제와 열악한 노동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며 주목 받았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현실은 나아진 것이 없어 가슴을 치게 만든다.
굴지의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는다. 정규직 전환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선희(염정아)와 싱글맘 혜미(문정희), 청소원 순례(김영애), 88만원 세대 미진(천우희), 인사팀 대리 동준(김강우) 등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미덕인 줄만 알았던 마트 노동자들은 힘을 모아 회사에 맞서 싸운다. 노동조합이 뭔지도 알지 못했던 평범한 이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자각해가는 모습이 현실감 있게 담겼다. 영화는 노동자들의 투쟁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당장의 생계 문제와 가족과의 갈등 등 각 인물이 처한 고민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살피며 공감과 이해를 넓혔다. 2007년 이랜드그룹이 운영하던 대형마트 홈에버에서 실제 벌어졌던 비정규직 대량 해고 사태를 각색했다.
영화는 힘겨운 현실에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힘과 불의에 맞서는 용기는 약자들의 연대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광화문에서도 시민들은 연대의 힘을 목격했다. 작은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되고 결국엔 어둠을 밝히는 커다란 빛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 영화에서 복직 노동자들과 해고 노동자들이 함께 카트를 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엔딩 장면은 그래서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레미제라블’(2012)
광화문에 ‘민중의 노래’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들끓는 분노가 이 노래로 승화됐다. “너는 듣고 있는가 분노한 민중의 노래,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 심장박동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내일이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의 감동적인 엔딩을 장식한 이 노래가 2016년 한국에서 촛불과 만났다.
동아방송예술대 학생들은 시국선언을 하면서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를 “더 이상 비선실세 볼 수 없다 외치는 소리” “당장에 박근혜는 퇴진하라 외치는 소리”로 개사해 불렀다.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도 이 노래를 연주하는 클래식 플래시몹이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5차 촛불집회에선 ‘시민과 함께하는 뮤지컬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내일의 희망을 노래했다. ‘레미제라블’의 넘버들은 촛불집회가 열리는 전국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레미제라블’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간 옥살이를 한 장발장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프랑스 6월 혁명의 한복판으로 달려나간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꾼 19세기 프랑스 민중의 모습에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간 시민들의 모습이 겹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뮤지컬로, 그 뮤지컬을 다시 영화로 옮긴 ‘레미제라블’은 2012년 12월 19일 국내 개봉해 뮤지컬영화로서는 드물게 592만명을 동원했다. 개봉일은 19대 대선일이었다. 이 영화의 흥행을 두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절반의 좌절감이 반영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 영화가 박근혜 정부의 탄생과 몰락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공교롭게 느껴진다.
‘33’(2016)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자 그 현장을 지켜보던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훔쳤다. 눈물로 젖은 얼굴 한 켠에는 웃음이 번졌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가슴을 쥐어짜는 고통 속에 살아온 이들이 처음으로 위로 받는 순간이었다.
파고 파고 또 파도 의혹이 화수분처럼 샘솟는 최순실 게이트의 중심엔 세월호 참사가 있다. 고귀한 생명들이 바다로 가라앉던 그 시간 박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어디서 무얼 했었는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정부가 진상 규명을 가로막으려 한 정황도 곳곳에서 증언으로 확인된다. 대체 무엇이 두려워 자꾸만 감추려 하는 걸까.
영화 ‘33’을 다시 떠올린다. 2010년 칠레에서 광산 붕괴로 지하 700m에 광부 33명이 매몰됐던 실제 사고를 스크린에 옮겼다. 광부들은 소량의 식량을 나눠먹으며 삶의 의지를 다졌고, 정부는 필사적으로 구조작업을 펼쳤다. 그리고 33명의 광부는 69일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우리는 비록 귀한 목숨을 잃었지만 더는 그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광장의 수백만 촛불은 지금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라 요구하고 있다. 진실은 매몰되지도 침몰하지도 않는다. 영화 ‘33’은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에 연료가 돼줄 영화다.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