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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외주 민주주의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입력
2017.07.2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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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21일 국가재정전략회의 마무리 발언에서 신고리 원전 5ㆍ6호기 건설중단 여부는 “공론조사에서 가부 결정이 나오면 받아들여져야 하며, 앞으로도 사회적 갈등 해결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탈원전 및 원전건설 중단” 공약을 민의 수렴과정을 거쳐 추진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는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공론조사 결과에 의사결정을 맡기자는 주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와 관련하여 심각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정부가 국가정책을 결정하거나, 정당들이 공직자 후보를 선정하고 정강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결함을 드러냈다. 첫째, 선거를 통해 선출된 국민의 대리자들이 주권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정당성의 위기다. 둘째, 조정과 타협의 부재로 인해 갈등관리비용이 급증하고 의사결정이 공전되는 문제다. 식물정부, 식물국회라는 비난과 함께 책임성의 위기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이중의 위기는 곧 대의제의 위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은 대의제의 정상화보다는 ‘민주주의의 외주화’라는 손쉬운 대안을 택했다. 2000년대 이후 정치적 설득과 타협, 자체의 의사결정 제도를 정비하기보다 여론조사 같은 조사방법에 결정을 위임하는 관행이 시작되었다. 민주적인 절차를 밟는 모양새를 갖추면서도, 의사결정의 외주화로 인해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데 유용했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여론조사 방법이다. 2002년 여론조사 결과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를 결정한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각 정당 공직자 후보 선출이나 후보단일화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개헌을 여론조사에 맡기자는 주장까지 공공연하게 나오는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응답율 문제나 조사환경의 변화로 여론조사 신뢰성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특히 응답자들이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숙고의 과정 없이 답변한 결과이기 때문에 민의를 왜곡한다는 불신도 커지고 있다. 그 결과 충분한 정보제공과 학습 및 숙의과정을 거친 여론, 즉 ‘공론(公論ㆍDeliberative Opinion)’을 파악하는 조사가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공론조사는 여론조사와 마찬가지로 전체 국민들 중 일정 수의 표본을 뽑아 전체 국민의 생각을 추론한다. 그러나 쟁점에 대한 찬반 논리와 근거를 충분히 제공하고, 숙의 과정을 통해 응답자들의 생각이 어떻게 성숙되어가는지 분석한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정책결정자 입장에서 보면, 찬반양론을 수렴하면서 다수가 설득 가능한 안을 만들어 가는 데 활용가치가 큰 조사방법이다.

그러나 어떤 조사방법도 의사결정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여론조사건 공론조사건 조사에 응하는 응답자들은 조사기관에 의해 선정된 표본일 뿐이다. 정부여당의 구상처럼 공론조사 참가자들에게 ‘시민 배심원’의 이름을 임의로 붙인다 해도 위임 받은 대리인이 아니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또한 이번 공론조사 과정에서도 과거 여론조사 외주과정에서 발생한 문제가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2002년, 2012년 대선 후보 단일화 과정이나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통합당이 기초단체 정당공천제 폐지 여부를 여론조사로 결정했던 과정을 상기해보자. 자신에게 유리한 설문과 표본추출 방법을 관철하기 위한 방법론 논쟁이 정책논쟁이나 숙의 과정을 밀어냈다. 복잡하고 정교한 조사디자인이 필요한 공론조사이기에 그 만큼 논쟁의 여지가 클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공론조사 역시 정치적 책임 문제가 남는다. 공론조사 결정이 수년 후 잘못된 결정으로 판명된다면 누가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인가. 시민배심원단이나 공론화위원회에 책임을 물어야 할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번 원전건설 중단 여부 의사결정을 외주해야 할 상황이라면 문제는 공론조사보다는 한국 대의제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공론조사의 부상이 대의제 정상화의 포기로 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한울 여시재 솔루션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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