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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연령차별과 자연의 소리

입력
2017.02.01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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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손주 한 놈이 결혼했다. 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로부터 내내 들은 소리는 “정정하시네요~”에 이어서 “참,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시더라?”였다. 연령차별주의자의 말에 의하면, 이런 인사치레는 몽땅 칭찬을 가장한 내면화한 연령차별주의에서 나오는 소리란다. 하긴 한결같은 이런 인사치레가 떨떠름하긴 했었다. 이런 인사치레에 대해 연령차별주의자가 일러 주는 대꾸는 “나이에 비해 좋아 보이시네요~” 하면 얼른 “댁도 나이에 비해 좋아 보이시네요” 라고 맞받아 치란다.

이어지는 대화는 소위 ‘노인 말투’(elder speak)로 이어진다. 마치 어린애 다루듯 다정하나 속맘이 빠진 말들이 오간다. “잘 잡숫고 넘어지지 마시고요~.” 누군 넘어지고 싶어 넘어지며 먹기 싫어 안 먹나. 이쯤에서 이런 오기가 발생한다. 이런 말들은 몽땅 내 나이를 상기시키는 교묘한 시도란다. 어쨌거나 이런 말을 들을 만큼 내 자신 노인이란 자각을 미처 체화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나 보다. 그 옛날 앙드레 지드도 하루에 몇 번이고 “나는 XX살이다”를 외우면서 자기 나이를 깨우쳤다던 생각이 난다.

노인의학전문의 로버트 버틀러는 1969년 연령차별(ageism)을 “노인, 노년 그리고 나이든 것 자체를 대하는 편견에 찬 태도들의 조합”으로 정의했다. 이 용어는 빠르게 퍼져 나갔고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실린 단어가 되었다. 연령차별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 딴지 걸 만하다. 하긴 우리 노년들뿐 아니라, 학생애들도 걔네들대로 어리다고 몰아서 받는 차별에 들고 일어 나서 ‘아수나’란 단체까지 만들었단다. 요즘은 선거연령을 낮춰 달라는 운동을 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연령차별을 투정하던 내가 한마디 변명의 여지도 없는 자가당착에 빠질 일을 저질렀다. 사연인즉슨 지난 주말 99세 된 어른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이 분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인이고, 지금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시는 분이다. 이 분의 원고교정을 봐 드린 뒤 제안해오신 거다. 토요일 하루 운전사가 달린 차를 쓸 수가 있으니 함께 팔당 쪽으로 드라이브를 하고 워커힐 호텔에 가서 밥을 먹자고 하셨다. 내 능력으로는 누릴 수 없는 호화로운 제안이지만 반갑지 않았다. 마침 그 날 나는 롯데 콘서트홀서 하는 시향 연주 티켓이 있었다. 완곡하게 음악회 핑계를 댔더니, 99세 어르신 왈, 워커힐 호텔서 밥 먹고 음악회까지 같이 가면 이 아니 좋은가 하셨다. 나는 놀랬다. 요즘 나는 ‘하루 한 가지’로 목표를 정한 바 있었기에 이 분의 체력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즐겁고 호사스러울 데이트 코스였다. 그런데 왜 즐겁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무심히 저지르는 연령차별에는 불만스러워 하면서 나야말로 연령차별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만약에 그 날 데이트 상대가 99세가 아닌 6, 70 언저리의 후배들과 다녔어도 이리 재미없고 피곤하기만 했을려나? 그렇다. 나는 지레 99세란 나이에 부담을 가졌었다. 그 분과의 대화를 즐기기보다는 99세 어른의 비위를 맞추고 보살피느라 피곤하다는 건 아니었을까. 내일 모레 나도 올라 앉을 그 나이다. 어쩌자고 나는 연령차별을 이리도 무자비하게 저지르는 걸까. 노인학에서 또래들과 어울려야지, 나이 많은 사람과의 어울림에서는 같이 즐기기보다는 연장자를 모셔야 한다는 의무감이 따른다더니, 그럼 그 탓일까? 그럼, 내가 즐기는 내 후배들과의 만남에서 걔네들도 나를 두고 이런 부담감을 느꼈을까? 어쨌거나 나의 뿌리깊은 연령차별에 의거한 내 행투리에 나는 넌더리를 쳤다.

어쩜, 이 모든 게 연령차별이라기보다는 자연의 소리가 아닐까. 그렇다고 베이비 토크로 끊임없이 주의사항들을 환기해 주는 젊은이들은 나를, 그리고 노인들을 ‘잠재적인 사고 유발자’로 치부해버리는 건 아닌가.

고광애 노년전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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