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강한 향으로 봄기운 채우는 한국의 허브 봄나물
겨울이 끝났다. 새 풀 옷을 입은 봄이 제 너머에서 오셨다. 무거운 코트와 패딩 점퍼가 세탁소로 보내질 때, 언 땅을 뚫고 나온 푸른 기운이 향기롭다. 비로소 봄이다. 백반집 반찬에도 봄 소식이 찾아왔다. 잘 묵은 시래기 나물 대신 싱그럽게 무친 새콤한 미나리가 자리를 차지하면 곧 봄이 오겠거니 한다. 추운 날씨에도 생생한 초록을 빛내는 미나리는 시금치며 봄동과 함께 일찍부터 도착하는 봄의 전령이다.
며칠 만에 시장 어귀에서부터 봄의 미각을 깨우는 봄나물 향이 가득 찼다. 쑥과 냉이, 달래뿐 아니라 머위, 땅두릅, 원추리, 씀바귀, 방풍나물, 세발나물, 참나물, 취나물이 일제히 나왔다. 한 해의 삶을 시작하는 이 새순들을 맛 보면 이탈리아의 바질 페스토가, 태국의 고수가 부럽지 않다. 개성 있는 강인한 향들을 맛보자면 모두가 한국의 허브다.
야생 머위 순을 살살 씹자 씁쓸한 뒷맛이 툭 남았다. 더 자라 아기 손바닥 만한 머위 잎은 텁텁할 정도로 쓴맛이 강하다. 갓 땅을 헤치고 나온 땅두릅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순을 입 안에 물자 쌉쌀하지만 단맛이 입 안에 남았다. 고소한 거문도 쑥 향은 바닷 바람에 실려 온 봄바람을 데려온 듯하다. 마늘대를 닮은 원추리는 달콤한 수분이 아삭거리며 별사탕처럼 터지고, 생마늘을 씹은 것처럼 맵싸한 은달래는 촉촉한 수분을 남긴다. 냉이와 씀바귀 뿌리는 달큼한 흙 내음이 싱그럽지만 정신이 확 드는 쓴맛은 씀바귀 뿌리에 있다. 울릉도 출신의 부지깽이는 새콤한 맛이 가볍게 돌아 침샘을 자극하고, 전호나물은 미나리처럼 물 많은 향채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향이 유달리 진하다. 세발나물은 부드러운 질감이며 향에 가벼운 짭짤한 맛이 숨어 있어 출신지가 바닷가임을 숨기지 않는다.
계절별로 나물은 무궁무진하다. 이른 봄부터 냉이, 달래, 쑥을 위시해 돌나물, 취나물, 참나물, 머위, 원추리, 민들레, 유채나물, 방풍나물, 여러 종류의 두릅, 죽순과 풋마늘대, 초부추, 봄동 등이 쏟아져 나온다. 봄나물은 겨울을 보내고 돋아난 새순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시기의 나물은 향이 강한 야생의 것이 다양하다. 여름부터는 아욱과 근대가 나오는데, 그 외에도 애호박, 가지, 오이 같은 익숙한 채소들도 제철을 맞아 밥상에 나물이 빠질 일이 없다. 가을에는 고구마순이나 토란대, 연근과 우엉, 마, 도라지, 더덕, 무 등이 풍성하다. 가장 먹을 것이 적은 겨울에도 나물이 아쉬울 일이 없다. 가을걷이 해 둔 무청과 배추 등으로 말린 시래기, 가을 볕에 말린 꼬득꼬득한 무말랭이며 호박고지, 가지고지, 그리고 배추 겉잎을 모아 삶아 냉동하거나 염장한 우거지는 저장음식으로 독특한 감칠맛이 난다. 늦겨울부터는 얼갈이 배추, 봄동, 시금치와 겨울에 가장 향이 진한 미나리가 식탁의 푸르름을 채운다. 사시사철 언제나 나오는 콩나물, 숙주나물도 있다.
어디까지 나물이고, 어디까지 나물이 아닐까? 나물의 정의를 놓고 보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이 모두 나물이다. 먹을 수 있다면 뿌리 역시 나물로 정의된다. 모든 채소는 나물이다. 그러나 식재료로서 나물이라고 할 때는 산과 들의 야생, 또는 야생에서 유래한 재배 식물을 가리키는 뉘앙스가 강하다. 사전은 나물의 예시로 고사리, 도라지, 두릅, 냉이를 든다. 또 나물을 삶거나 볶거나, 날것으로 양념해 무친 요리를 모두 나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나 당근 같은 포괄적인 범위의 채소, 뿌리 채소까지도 다 나물이 된다는 의미다.
보잘것없는 푸성귀의 화려한 변신
그래 봐야 고기가 아닌 풀이다. 보잘것없는 푸성귀로 풍부한 맛을 추구하다 보니 먹는 방법도 다양하게 내려온다. 바질이나 고수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봄나물도 갖은 조리법이 발달돼 이어져 왔다.
봄나물은 뭐니 뭐니 해도 생으로 무치는 것이 가장 향긋하다. 한국식 봄 샐러드다. 겉절이 스타일로 먹기 직전에 무치는데, 양념에 초를 더해 새콤한 맛을 가미하면 특히 잘 어울린다. 초의 산은 푸른 빛을 우중충하게 변색시키므로 먹기 직전에 무쳐야 색도 살고 싱싱한 질감도 잃지 않는다. 나물은 성장할수록 맛이 독해지기 때문에 최대한 어린 순을 골라 무쳐야 한다.
데쳐서 무쳐야 하는 나물도 많은데, 식물이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독성을 품기도 해서다. 특히 토란대나 죽순은 아린 맛이 있어 전 처리가 필수다. 독성이 없는 나물도 데쳐 쓰면 억센 풋내를 제거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얻을 수 있다. 나물을 데칠 때는 소금 간한 끓는 물에 푸릇푸릇하게 재빨리 데쳐야 색과 맛을 잃지 않는다. 숙채 양념은 선택의 여지가 많은데, 매콤달콤한 고추장, 구수하게 된장, 감칠맛을 살려 국간장, 아니면 소금으로 깔끔하게 맛을 잡기도 한다. 국간장 베이스 양념엔 두부를 으깨 뒤섞고 들깨가루를 곁들여도 잘 어울린다.
볶음은 지용성 영양분이 많은 나물에 유용한 조리법이다. 대표적인 지용성 비타민 식품인 당근은 기름을 만났을 때 가장 맛도 좋다. 말린 묵을 사용한 묵나물도 물에 충분히 불려 오래 볶을 수록 부드러워진다. 건조 과정에서 숙성된 말린 나물을 사용할 때는 참기름이나 들기름으로 구수한 맛을 강조하면 잘 어울린다.
나물을 주인공으로 올리면 다양한 별미도 만들어진다. 향이 강한 나물은 바삭하게 튀기면 더욱 향긋하다. 전으로 부치기도 좋다. 쑥국이나 쑥떡, 쑥버무리는 봄에 실컷 먹어 둬야 제 맛인 계절음식이다. 쑥을 손질해 냉동해 두면 사시사철 향을 즐길 수 있지만, 해동한 쑥은 제철처럼 흥이 살지 않는다. 밥에 나물 반찬을 올리고 강된장이나 고추장 조금 얹어 삭삭 비비면 그 자체로 훌륭한 비빔밥이 되고, 밥을 지을 때 국간장으로 밑간한 나물을 볶아 넣으면 나물밥이, 밥을 죽처럼 쑤면 고소한 나물죽이 된다. 밥을 지어 갖은 나물을 조물조물 뭉치면 주먹밥이, 밥 안에 나물을 깔아 김밥을 말면 별미 나물김밥이 된다. 파스타에 어울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올리브 오일 파스타에 바질 같은 허브 대신 참나물이나 취나물 등 생으로 먹어도 향이 부드러운 나물을 얹어 먹어도 잘 어울린다.
한식 레스토랑 ‘두레유’ 오너 셰프 유현수씨의 파인다이닝 문법의 나물 요리다. 보기도 좋고 맛도 섬세하고 세련되면서도 쉽게 따라 해 볼 만하다. 나물 탕수는 얇은 튀김옷을 입힌 씀바귀 뿌리와 땅두릅을 고온에 빠르게 튀겨 바삭바삭하게 만든 튀김 위에 소스를 얹어 낸다. 소스는 간장과 설탕에 물과 전분으로 농도를 조절하는데, 처치 곤란인 장아찌 국물을 한 번 끓여 간장 대신 활용하면 더욱 맛이 깊다. 유 셰프의 두 번째 요리는 나물선. 로브스터와 게를 쪄서 살만 발라내 완자를 만들고 데친 나물 갖가지를 데친 머위 잎으로 감싸 김밥처럼 둘둘 만 후 잘라 내는 요리다. 나물은 원추리와 부지깽이를 데쳐 게살을 감싸고 데친 머위잎을 겉으로 감싸 만다. 속을 채울 나물은 달큰한 갑각류의 살과 어울리는 다른 것들로 사용해도 된다. 얇게 썬 무와 전호나물, 어린 머위 순을 곁들이고, 소스는 김치국물을 졸여 전분으로 농도를 잡아 살짝 찍으면 매콤하게 잘 어울린다.
이해림 객원기자 herimthefoodwriter@gmail.com
사진 강태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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