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출입 기자 시절 법조인들과 전관예우를 놓고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소송ㆍ사건 당사자들이 거금을 싸들고 ‘전관(前官)’을 찾아 헤매는 현실을 감안하면 전관예우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게 기자들의 주장이었다. 법조계를 향한 성토에 현직 법조인들은 전관예우를 유령과도 같은 존재라고 반박했다. 전관이 소송이나 수사를 유리하게 종결시켰다는 실증 자료가 없는데다 법원이나 검찰의 전관예우 근절책이 강하게 작동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전관을 찾는 수요가 실재한다면 유령일지라도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게 그 자리의 결론으로 기억된다.
전관예우라는 유령을 떠올린 것은 ‘정윤회 문건’ 파문을 향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항변 때문이었다. 김 실장은 비선(秘線) 실세 파문과 관련해 쏟아지는 의혹에 대해 “유령과 싸우는 것 같다”는 심경을 토로했다고 한다. 문제의 문건을 ‘시중에 떠도는 풍설(風說)에 불과하다’며 묵살한 장본인 입장에서는, 실체적 진실이 확인되지 않은 문건의 존재만 갖고 청와대와 정권을 흔들어 대는 보이지 않는 세력을 유령으로 볼만도 하다.
유령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허깨비 같은 존재다. 어둡고 불투명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유령은 그래서 실존 자체가 의심을 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김 실장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 갖은 의혹으로 청와대를 흔드는 언론과 야권을 유령으로 지목한 듯하지만 언론과 야권은 분명한 실체적 존재다.
시중에서는 도리어 ‘국정 농단’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유령으로 보고 있다. 막후 실세로 거론되는 정윤회씨나 박지만 EG회장의 경우 각종 청탁의 대가로 금품을 수수했다거나 인사에 개입했다는 딱 떨어지는 증거는 없고, 정씨와 박 회장의 그림자가 드리운 권력암투설 내지는 파워게임설만 무성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스토리는 온 국민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한 유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문고리 3인방’의 권력도 유령이나 다름없다. 문화체육관광부 인사 개입 의혹과 문건 제보자와의 친분 등으로 3인방이 구설수에 올라 있지만 마찬가지로 확인된 바는 하나도 없다. 이재만 비서관의 경우 정윤회씨와 접촉을 부인하다 번복하면서 흠집이 났어도 과거 정권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혔던 ‘집사들의 수난’과는 성격이 다르다.
비선 실세라는 유령의 존재와 실체는 문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에 맡길 일이다. 문제는 검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유령이 발호할 조건은 충분하다는 점이다. 이번 파문을 통해 드러난 청와대 비선 관리의 허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정윤회씨의 경우 박 대통령이 “오래 전에 떠난 사람”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지난해 중반 승마협회 감사 논란 때부터 그의 이름이 거론된 터였다. 이후 박지만 회장 미행설의 당사자로 지목됐는데도 (김 실장의 문건 묵살로) 제재를 받지 않았다. 정씨 주변의 호가호위하는 세력의 움직임도 체크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박 회장을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담당하는 구조는 더욱 난센스다.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박 회장 라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도 그에게 박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업무를 맡겼다. 정씨가 “문건은 조작됐다”며 박 회장 라인을 정면으로 겨누는 것도 이런 시스템에 대한 지적일 수 있다.
3인방 문제는 박 대통령의 접근법을 납득하기 어렵다. 3인방이 각종 인사에 개입하고 장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대통령 대면보고마저 가로막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 지 오래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말썽 일으킬 사람들이 아니다”며 엄호에 급급했다.
비선 실세라는 유령을 퇴치하는 방법은 이미 제시돼 있다. 유령이 발붙일 조건을 없애면 된다. 박 대통령이 ‘3인방의 성’을 허물어 투명한 절차를 허용하면 ‘집사 유령’은 사라질 것이고 김기춘 실장을 중심으로 친인척 관리를 담당하는 참모진을 일신하면 ‘막후 유령’도 잡을 수 있다.
김정곤 정치부장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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