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생 매니저인 최봉호(崔奉鎬ㆍ66)씨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1950년대 말 군부대 위문공연단을 쫓아다니며 겨우 생계를 꾸려가던 그가 70년대에는 이미 연예계의 대부가 돼 있었다.
국내 처음으로 연예인이 출연하는 밤업소 서울구락부를 차린 것도, 나를 하춘화 쇼와 서울구락부에 출연시킨 것도 바로 그다.
한때 리버사이드 호텔, 롯데월드, 뉴월드 호텔, 북악파크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할 정도로 사업 수완도 대단했다.
그의 타고난 배짱과 빠른 머리회전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80년대 말 나와 함께 홍콩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고급 시계인 롤렉스를 하나씩 샀는데 귀국시 세관 통과가 걱정이 됐다.
나는 세관원 눈을 피하기 위해 비행기에 타기 전부터 시계를 양복 속 겨드랑이 아래에 찼다. 그런데 최씨는 시계를 대충 가방에 던져놓고는 천하태평이었다.
김포공항 도착 10분 전. 갑자기 그가 “아이고, 배야!” 하더니 떼굴떼굴 구르는 게 아닌가. 승무원들은 난리가 났다.
그는 결국 비행기 트랩까지 마중 나온 앰뷸런스를 타고 무사히 공항을 빠져나갔고, 나는 어깻죽지에 시계를 찬 채 그의 가방까지 들고 세관을 통과해야 했다.
겨우 공항을 빠져나와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그가 씩 웃으며 다가왔다. “내 연기 괜찮았지?”
내가 88년 9월 서울 이태원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 사장이 된 것도 어쩌면 최씨 덕분이다.
하루는 최씨가 불쑥 나를 찾아오더니 “술집 사장 한번 해 볼래?”라고 말했다.
“연예인으로서는 정상에 오른만큼 이제 사업가로도 폭을 넓혀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나는 내 팬이었던 캐피탈호텔 회장으로부터 “우리 호텔의 부대사업을 하나 맡아보라”는 권유를 받고 있던 터였다.
나는 한동안 고심했다. 평소 사업에는 관심도 없었을뿐만 아니라 사업을 시도하다가 본업까지 마감한 동료 연예인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트클럽 운영에 관한 한 나만 믿으면 된다”는 최씨의 끈질긴 설득이 결국 성공한 셈이 됐다.
총공사비 30억 원에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인 800평짜리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은 이렇게 탄생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이트클럽을 꾸몄다.
최씨와 함께 홍콩, 대만, 미국의 유명 나이트클럽 10여 곳을 현지 시찰했고, 세계적인 실내장식가인 중국계 미국인 칼슨에게 인테리어를 맡겼다.
당시 내 꿈은 “이 업소를 전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업소로 만들어 노인 복지와 불우이웃 돕기에 쓰겠다”는 것이었다.
그해 9월 9일 마침내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이 문을 열었다. 사업가로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날이었다.
사업은 이후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고 90년에는 나산그룹 안병균(安秉鈞) 회장이 운영하던 홀리데이 인 서울까지 인수했다.
여기저기서 동업 제의가 들어오는 등 나름대로 사업 수완을 인정 받았던 시절이었다.
끝으로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 개장식 날 있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나는 그날 평소 친분이 있던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을 룸으로 초대했다.
과일 안주며 맥주를 한 상 가득 준비한 것은 물론. 그런데 보좌진 15명과 함께 룸에 들어간 정 회장은 술상을 보더니 화부터 냈다.
“누가 이 음식을 다 먹나? 어서 안주와 맥주의 반을 내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아가씨들에게는 일일이 20만원 씩 나눠주던 정 회장의 인간적인 모습은 그 때 처음 봤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