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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현실 유쾌한 풍자… 대학가 졸업 현수막

입력
2017.02.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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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졸업식이 열린 수도권 한 대학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어도 축하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지난 15일 졸업식이 열린 수도권 한 대학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어도 축하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사람 얼굴이 합성된 포켓몬 캐릭터가 나란히 출동 태세를 갖추고 있다. 알록달록한 현수막 한쪽은 마스터의 힘찬 명령이 장식했다. “정규직 GO!” 지난 17일 학위수여식이 열린 서울 노원구 서울여자대학교,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GO’를 본뜬 졸업 현수막 앞에서 주인공들은 밝은 표정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주인공 중 한명인 졸업생 유경(25ㆍ여) 씨는 “친한 친구 셋 다 정규직 취업이 안된 상태인데 특히 프리랜서로 일하는 친구가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있어 꼭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말했다.

17일 서울여대.
17일 서울여대.

졸업 시즌을 맞은 대학가에 기발한 패러디 현수막이 넘친다. 사진 한 장, 말 한 마디로 국정농단 사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드라마 속 명대사도 축하 메시지에 녹여 넣었다. 심각한 취업난에 치솟는 물가, ‘학교 밖은 위험해’라는 현수막 문구처럼 달갑지 않은 졸업이지만 유쾌한 패러디 한 방으로 서로의 청춘을 위로한다. 다시 오지 않을 캠퍼스의 추억을 재치 넘치는 아이디어로 장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로 300, 세로 90㎝의 네모난 천에 담긴 ‘웃픈(웃긴데 슬픈)’ 청춘의 이야기를 전한다.

#국정농단

2017년 2월 졸업 현수막의 단골 아이템 중 하나는 국정농단 사태다. 이미 유행어로 자리 잡은 대통령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발언부터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에서 수없이 반복된 ‘기억나지 않는다’까지, 우리 사회가 앓아온 비상식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비꼬는 데 더 없이 좋은 재료다. 17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앞엔 법조계와 권력의 암투를 담은 영화 ‘더킹’의 포스터에 졸업생 얼굴을 담고 ‘우병우처럼만 되지 말자’는 문구가 걸리기도 했다.

17일 한국외대.
17일 한국외대.
17일 한국외대.
17일 한국외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도깨비

지난 달 종영한 TV 드라마 ‘도깨비’의 열풍은 학위수여식 현장에서도 식지 않았다. “삼수가 버거워서, 중국어가 어려워서, 연극대가 힘들어서, 모든 날이 헬이었다(한양대).” 또는 “학점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졸업이었다(서울여대).” 와 같이 드라마 속 대사를 따온 문구들이 캠퍼스 곳곳에서 흔했다. 포스터 속 등장인물 사진에 졸업생의 얼굴을 합성한 현수막도 눈에 띄었다. 졸업 현수막은 날이 좋았던, 좋지 않았던, 졸업생들과 함께 한 대학생활을 모두 눈부신 추억으로 기억하며 축하했다.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9일 서울여대.
19일 서울여대.
17일 한국외대.
17일 한국외대.

#그래도 축하해

“권OO(24세) 무직 장OO(25세) 무직,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15일 수도권의 한 대학교에 걸린 졸업 현수막에서 ‘무직’이란 글자가 유독 눈에 띈다. 얼핏 보면 조롱 같지만 누구나 취업난의 희생자임을 역설하는 무겁고 담담한 풍자다. “비록 취업은 못했어도 축하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는 소리 없는 웅변이다. 현수막의 주인공 장모(25ㆍ여)씨는 “졸업하자마자 닥친 현실이 ‘무직’이라 씁쓸하지만 축하 받는 것 자체가 기쁘고 고마운 일”이라며 “앞으로 저 현수막을 생각할 때마다 큰 힘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재학 생활을 마친 인내와 고난의 아이콘… 자, 이제 미생이 되어 또 고통 받을 그를 모두 응원하자(한양대)” “어제는 학점의 노예 내일은 월급의 노예(한양대)”라고 쓴 현수막은 학점경쟁을 어렵게 통과한 졸업생들에게 앞으로 닥칠 더 치열한 경쟁을 준비하라는 듯 비장하다.

15일 수도권 한 대학.
15일 수도권 한 대학.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5일 수원대.
15일 수원대.

#빛나는 아이디어, ‘핸드메이드’ 현수막

한국외대 재학생 신하림(22ㆍ여)씨는 선배의 졸업식을 앞두고 도화지에 붉은 십자가를 그린 다음 ‘경아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썼다. 명동 거리에서 본 민폐 전도자의 팻말을 패러디 한 수제 현수막이다. 신씨는 “사회로 나가 정신 없이 살기 전 즐길 마지막 파티가 졸업식”이라며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 준비했다”고 말했다.

14일 서강대학교를 졸업한 박세진(27ㆍ남)씨 역시 후배들이 준비한 수제 현수막 덕분에 잊지 못할 졸업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최근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시작한 박씨를 위해 사진 창을 오려내 만든 일명 ‘졸업스타그램’ 현수막은 들인 정성만큼 단연 인기를 끌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17일 한국외대.
17일 한국외대.
14일 서강대.
14일 서강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17일 경희대.
17일 경희대.
16일 한양대.
16일 한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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