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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나쁜 표현’ 대처법

입력
2014.09.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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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나쁜 표현’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진단도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단순히 나쁘거나, 저속하거나, 허위사실이라는 수준을 넘어 이미 차별받고 있는 소수자나 국가폭력ㆍ재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언어폭력은 더 이상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표현’ 자체를 규제하자고 할 때는 아주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유로 둔탁한 망치를 마구 휘둘렀다가는 표현의 자유가 전반적으로 위축되는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을 명료하게 파악하고, 문제가 되는 부분만 날카로운 메스로 도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나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고 무슨 이유에서 규제가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이런 합의가 불충분하면 ‘나쁜 표현’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한 규제가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도 커진다. 나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나쁘다고 간주해 버리게 되면 대책 없는 힘겨루기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표현의 자유의 한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확립된 기준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혐오표현’(hate speech)이다. 인종, 종교, 성별, 장애, 성적 지향 등 차별사유들을 근거로 혐오를 조장하는 선동적, 모욕적, 위협적 표현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충 봐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나쁘다’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혐오표현보다 더 나쁜 표현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혐오표현을 특별히 규제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혐오표현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은 소수자들을 공동체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하는 다수자의 폭력이며, 실제로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상의 자유 시장’에서의 진정한 경쟁이 가능하려면 누구나 그 시장에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만약 소수자를 고립시키고 배제하는 언어폭력으로 인해 소수자들이 시장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면 이 시장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할 수 없다. 상품이 거래되는 시장에서도 시장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을 규제하듯이 사상의 자유시장에서도 다수자의 권력 남용은 규제대상이 될 수 있다. ‘자정’에 의해 해소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정한 개입을 통해 소수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조치는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는 주로 인종차별에 기반한 혐오와 증오를 규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왔지만, 한국사회에서라면 특정지역에 대한 차별적 혐오나 국가폭력ㆍ재난 피해자에 대한 공격적인 증오가 같은 맥락에서 후보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혐오표현의 확산을 스스로 막을 수 있다면 여전히 그것이 최선의 길이다. 그런 면에서 ‘민주시민교육’과 ‘민주적 시민문화의 확립’이라는 근본적인 해법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원적인 해법들이 중층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형사처벌은 가장 강력한 수단이지만 극단적인 경우에만 적용되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둬야 하고 민사배상, 차별금지법에 의한 시정조치, 학칙ㆍ사규 등 기관별 내부규제, 언론중재 등 대체적 분쟁해결제도(ADR) 등 다양한 해법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쯤 해서 나쁜 표현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무차별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모욕죄나 명예훼손죄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도 자연스럽게 요청된다. 요즘 나쁜 표현을 잡는다고 모욕죄ㆍ명예훼손죄가 무분별하게 활용되고 있는 현상은 ‘둔탁한 망치’를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공기관이나 공직자들이 ‘나쁜 표현’을 일소한다는 이유로 법을 동원하는 것이 부당한 이유도 드러난다. 다수자의 폭력적 언사에 의해 사회에서 배제되는 소수자의 처지와 보도자료만 뿌려도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얼마든지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공기관ㆍ공직자의 상황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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