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에겐 고급 ‘힐링문학’
외로운 사람들에 위안을 줘
거대담론 사라진 한국에선
감수성 가득한 ‘동경의 대상’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론
이ㆍ팔 등 사회적 발언 시작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가 24일 일본에서 발매되며 하루키 열풍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2권 이상 장편으로는 ‘1Q84’ 이후 7년만인 이 신작은 “초판 발행부수가 3,000부 내외로 한국 소설만큼 줄어든”(양은경 민음사 해외문학팀 차장) 일본 출판계에서 이례적으로 초판 130만부를 찍었다.
한국 출판계도 들썩이고 있다. ‘1Q84’ 선인세가 10억원, 2013년 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선인세가 16억원대로 추정된 점에 비춰 이번 신작 인세는 20억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국내 중견 소설가들의 선인세가 평균 30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초대형 특급대우’가 분명하다. 갈수록 어렵다는 한국 출판계는 왜 이토록 하루키 사랑에 몰두하는 걸까.
하루키 인기 이유, 한국 일본 달라
한국과 일본에서의 ‘하루키 현상’은 강력한 팬덤과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인기 이유는 다르다”고 말한다. 1989년부터 10년간 와세다대학 객원교수였던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일본인에게 하루키 소설은 고급 힐링 문학”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매년 수업시간에 하루키 소설을 읽으며 우는 학생을 봤다”며 ‘노르웨이의 숲’ 도입부의 대학생 자살 장면 등에서 특히 자주 운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하루키 소설 이면에 허무주의, 결핍주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데, 일본 사회가 권태로워서 일탈도 많지만 반대로 혼자 있을 때 너무나 외로운 사회”라고도 분석했다. 그는 “하루키 소설이 사회적 패배자들에게 엄청난 위안을 준다”며 “새벽에 줄을 서서 하루키 책을 사는 행위는 그들에게 ‘구원의 행동’인 셈”이라고 덧붙였다.
반면 한국에서 1980~90년대 하루키 소설은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게 문학계 중론이다. 거대 담론이 사라진 시대, 개인의 윤리를 세련된 감성으로 말하는 하루키에 매혹됐다는 것이다.
김춘미 고려대 명예교수는 논문 ‘한국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1980년대까지는 독자와 작가가 함께 호흡했다면 1990년대부터 작가와 독자가 괴리되기 시작하면서 독지들이 일본문학에 쏠림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하루키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치 하루키를 기다렸다는 듯이 재즈 붐이 일어나고, 스파게티가 등장하고,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는 등 모든 면에서 한국사회는 ‘문화적’이 되어간다. ‘상실의 시대’는 1990년대 젊은이들의 해방구가 되었다”는 진단이다. 이명원(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문학평론가는 “자본주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하루키의 도시적 감수성이 호소력을 발휘하는 건 다른 나라에서도 확인된다”며 “(2008년)베이징 올림픽 직후 중국에서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말했다.
하나의 브랜드이자 하나의 장르
하루키 소설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살고 있는 도시인들의 내적 공허감과 소통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다. 보편적이면서 현대적인 주제가 하루키를 ‘일개 일본 작가’가 아닌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하게 했다. 양은경 차장은 “하루키는 (미국 작가)필립 로스나 (인도계 영국 작가)살만 루슈디처럼, 특정 지역이나 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작가와 다르다”며 “독자들은 단지 하루키라는 브랜드로 소비한다”고 말했다. 구환희 교보문고 MD는 “다른 일본 작가가 기성 문학 카테고리에 포함된다고 하면 하루키는 하루키라는 이름이 하나의 장르가 됐다”고 말했다. “흔히 ‘동어 반복’이라고 지적되는 하루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특징은 하루키 스타일로 자리매김해 계속 독자를 매혹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 독자들은 파스타를 알단테(적당히 씹는 느낌이 들도록 채소나 면을 익히는 조리법)로 익히고, 올드팝을 듣는 ‘하루키 감성’을 정말 동경하는 것일까. 하루키 열풍이 20년째 이어지고, 20대 독자가 바다 건너 초로의 작가 신작을 기다리는 현상은 여전히 큰 물음표다. 황문정 문학동네 해외문학팀 부장은 “그동안 축적한 작가적 명성으로 독자층을 넓혀온 게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며 “하루키 작품이 갖는 ‘이야기성’은 독자 입장에서 하루키 문학의 전반적 맥락을 검토하지 않고 읽어도 몰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황 부장은 “최근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며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오른 점도 이유로 들었다.
하루키 소설의 진화도 인기가 지속되는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1Q84’이후 작품세계에 전환을 맞으며 사회성과 판타지성을 강화하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었다는 분석이다. 이명원 교수는 “‘1Q84’에서 옴진리교 사건 후 일본의 고립된 광신적 공동체주의에 대한 비판이 조지 오웰 식의 묵시록적 전망으로 펼쳐진다”며 “하루키 소설을 읽지 않았던 새로운 독자는 이런 부분을 시대, 역사적 맥락에서 읽는 게 아니라 ‘다빈치 코드’처럼 인공적 배경의 추리물로 읽는다”고 말했다. 개인주의를 추구해온 하루키는 ‘1Q84’ 발표 즈음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 전쟁 포기를 담고 있는 일본 헌법 9조 문제 등에 대한 사회적 발언을 시작하며 독자들과 호흡하는 작가라는 인식을 심기도 했다. 이 교수는 “최근작을 보면 나쓰메 소세키를 자기 식으로 갱신하겠다는 야심도 보인다”며 “소세키도 청년을 주인공으로 사소설을 썼는데 하루키가 그 점에서 소세키를 롤모델로 찾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김도엽 인턴기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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