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무얼 챙길지 누군가 물어왔다. 악기를 가져갈 수 있을까, 애절히 반문했다. 그렇다면야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악보를 챙겨 남은 여생을 모조리 들이 부어도 모자랄 연습을 하고 싶었다. 혹시 무인도에 용케 전기를 끌어올 수 있을까, 뻔뻔히 다시 물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한 장의 음반도 챙겨갈 것이다. 바흐 푸가의 기법, 들어도 들어도 지루하지 않을 풀어도 풀어도 불가해할 음악이어서 무인도 체류가 지루하지 않을 성 싶었다.
바흐는 ‘대위법’을 능숙히 다룬 작곡가이다. 여러 성부가 독립적으로 등장하는 이 다성음악엔 거울에 비춘 또 다른 자아, 즉 ‘대선율(counter point)’이 등장한다. 흔히 대선율은 바깥 윤곽선을 이끄는 ‘외성’이 아니라 내용물을 채우는 ‘내성’에 자리 잡는다. 거울에 비친 흐릿한 자아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내성의 라인을 실제 목소리로 노래해보는 것도 좋은 연습방법이다. 그러나 불투명한 동선을 매끈히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외성이 내성의 스텝을 끊임없이 엉켜놓기 때문이다. 성공에 잇닿을 수만 있다면, 손끝에서 입체적인 오케스트라 음향이 들리는 듯한 환희를 맛볼 수 있다.
대위법 선율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것은 지뢰밭에서 어렵사리 길을 열어가는 것과 같다. 운신의 폭은 답답히 제한되어 있고, 밟지 않아야 할 음정과 건드리면 안 되는 동선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부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바둑판 위 오목마냥 몇 수 앞을 미리미리 내다볼 선견지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니 바흐 음악을 마주할 때면 논리적 사고와 입체적 공간감 그리고 인내가 늘 간절하다. 종종 컴컴한 땅속에서 굴을 파는 굴착기가 돼버린 심정이 들기도 한다.
바흐는 1749년 ‘푸가의 기법’을 작곡하다 1750년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지뢰밭 밑 굴착기가 되는 것을 스스로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부 간 꽉 짜인 동선과 이음새는 일탈의 공포로부터 자유롭다. 대위법의 온갖 규칙이 강제하는 불문율과 금기 역시 의연히 맞선다. 조성의 바탕은 시종일관 라단조, 막다른 골목에선 잔꾀를 내어 다른 조성으로 일탈할 만도 하건만 진득하고 투박하게 이 한 조성에서 머문다.
푸가의 기법은 그의 죽음과 함께 미완성인 채로 남았다. 마무리 하지 못한 문장을 아련히 열어두는 역할을 현악 4중주 버전에서는 비올라가 도맡기도 한다. 출판업자의 실수로 함께 묶여 출판됐다던 G 메이저의 코랄이 뒤이어 연주되는 것이 관행이지만, 나에겐 굴착기의 대장정을 따라 나서며 가장 애달피 기다려온 순간이다.
푸가의 기법을 듣다 보면 바흐의 죽음에 대하여 위인전에 나와있지 않은 일종의 확신이 생기곤 한다. 육체는 쇠잔했을 망정 정신은 노작의 의욕으로 형형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2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죽음이 여전히 애석하다.
바흐 전문 피아니스트로 손꼽히는 시몬 디너스틴은 ‘루바토’를 이르러 ‘자연스런 호흡’이라 밝히고 있다. 허나 대개의 통념은 다르다. 바흐 연주에 있어 루바토는 절제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것이다. 루바토에 관한 디너스틴의 독창적인 생각은 프레이징을 다루는 것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느린 악절에서 멜로디 라인은 마치 현악기로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약박을 진한 음색으로 처리한다든지, 아포지아투라 같은 비화성음을 앞으로 길게 꺼내 강조하면서, 프레이징의 자잘한 굴곡을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현악기 주자가 들려주는 비브라토의 압력과 줄을 넘나들며 만드는 활의 공간 차가 연상되는 인상적인 연주이다.
요 며칠 악기 곁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악보를 야심 차게 펼쳐 놓았다. 빠른 악절을 맞닥뜨렸을 때 건반액션의 스프링 탄력을 활용하면서 통통 튀는 터치를 갖고 싶었다. 손끝과 건반에 마치 N극과 S극의 자석이 붙어있는 듯, 인력과 척력을 적절히 조화시킨 밀도 높은 터치 또한 갖고 싶었다. 그러나 짧은 스타카토에 점성의 질감을 첨 하는 것은 웬만한 공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일이다. 발음은 명확하되 강약고저를 거침없이 자유롭게 들려주고 싶다. 시간과 공간이 고립되어 흘러갈 무인도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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