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으로 손 안에 들어온 지식, 이제는 연결과 창조의 능력이 필요
인간 진화 과정 몸에 밴 나쁜 습관, 호전성ㆍ그릇된 관습ㆍ맹종ㆍ적개심...
과학의 힘 없으면 청산하지 못해
학생 부담된다고 어려운 과목 빼자는 문ㆍ이과 통합에 대한 논의들 한심
과학의 커다란 질문은 인문학서 나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던 2005년 출간 도서 ‘대담’(휴머니스트 발행)에서 인문학자 도정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학장)과 생물학자 최재천(이화여대 석좌교수ㆍ국립생태원장)은 지식과 학문의 융합과 통섭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9년,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대중 앞에서 대담을 했다. 28일 저녁 서울 대학로의 공연장 유니플렉스에서 열린 인문학 콘서트에서다. 통섭, 대학의 미래, 교육 개혁 등을 주제로 밤 10시까지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진 대담은 고교생, 대학생, 교사, 일반인 등 900여명이 경청했고 분위기는 뜨거웠다.
“지식은 이제 우리 손 안에 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되니까 머리에 넣고 다닐 필요가 없지요. 지식의 습득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한 시대입니다.”(도정일)
“지식의 습득보다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과, 흩어져 있는 지식을 연결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 다시 말해 통섭과 융합이 중요해졌습니다.”(최재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왜 필요한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로 도 교수는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다.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존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둘째,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다. 세계는 문제투성이다. 산적한 과제를 풀려면 둘이 만나야 한다.”
최 교수는 데카르트만 해도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였음을 환기시키면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재회)은 필연이라고 강조했다. “학문의 구분은 편의상 만든 것일 뿐이어서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라며 “둘을 분리하는 건 원시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인문학 교육이 신제품 개발로 이어진 사례를 들면서 “담을 넘지 않으면 창의성이 나올 수 없다. 통섭은 학문 세계뿐 아니라 먹고 사는 경제 문제를 풀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학의 미래에 대해 두 사람은 대학의 존재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식의 생산과 전파 방식이 달라졌다. 대학의 온라인 공개 강의가 많아지는 등 교수의 강의실 수업이 전부가 아니다. 지식의 수명이 짧아짐에 따라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3, 4년만 지나도 유효하지 않다. 그때마다 다시 대학에 가야 하는가. 지금과 같은 대학은 20~30년, 아주 길게 잡아 50년 내에 소멸할 거라는 예측이 많다. 대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존재의 이유와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도정일)
“대학이 직업훈련소가 됐다. 그마저 제대로 못한다. 지금 대학은 졸업생이 첫 번째 직장을 얻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그러나 90세, 100세까지 사는 시대는 평생 하나의 직업만 갖는 게 아니다.”(최재천)
최 교수는 교육부가 추진하는 문과와 이과 통합 교육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문ㆍ이과 통합을 10년 넘게 ‘울부짖어온’ 사람으로서, (통합이라는 방향은 옳지만) 구체적 논의를 보면 한심하기도 하다. 학생의 수업 부담을 던다고 이과의 어려운 과목을 줄이자는 말은 합치지 말자는 얘기나 같다. 양자역학 수준으로 공부할 필요는 없지만, 과학적 소양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세상이다.”
도 교수도 과학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어릴 때부터 삶의 현장에서 과학을 배워야 한다. 예컨대 요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을 배울 수 있다. 단 과학을 맹신하는 과학만능주의는 옳지 않다. 종교와 신화를 폄하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베스트셀러 ‘만들어진 신’이 대표적이다.”
최 교수가 바로 공감을 표시했다. “과학에만 빠진 과학자는 위대한 과학자의 조수로는 훌륭하지만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 진짜 커다란 질문은 인문학 소양을 갖춘 과학자에게서 나온다.”
긴 대담은 청중들이 던진 많은 질문 중 두 가지에 답하는 것으로 끝났다. 인문학이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건 알겠는데, 인문학도가 자연과학을 공부하면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질문에 도 교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며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를 인용해 답했다.
“세이건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몸에 밴 나쁜 버릇으로 호전성, 그릇된 관습, 지도자에 대한 맹종, 이방인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 등을 꼽았다. 또 ‘꽉 쥐면 부스러질 것 같은 작고 푸른 점’ 지구에 발붙이면 안 될 것으로 극단적인 민족주의, 종교적 맹신, 맹목적인 국가주의를 지적했다. 과학의 힘이 없으면 이런 것들을 청산할 수 없다.”
이과 공부를 안 해본 인문학도는 뒤늦게 자연과학을 알고 싶어도 배울 곳이 없다며 길을 묻는 질문에 최 교수는 ‘기획 독서’를 제안했다.
“자연과학도가 인문학 소양을 갖추기는 가능해도 그 반대는 어렵다. 자연과학은 입문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배우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해결책으로 독서를 권한다. 힐링용 취미 독서가 아니라, 나에게 부족한 분야를 붙들고 씨름하는 기획 독서를 권한다.”
이날 대담은 11월 11일 네이버 캐스트로 방송한다. ‘대담’을 낸 출판사 휴머니스트는 이날 대담을 포함한 10주년 개정판을 내년에 낼 예정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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