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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2> 동문수학한 운명의 맞수가 벌인 '피 묻은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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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2> 동문수학한 운명의 맞수가 벌인 '피 묻은 대결'

입력
2011.03.0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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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감독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홍성기 감독은 해방 전 만주에서 만영이라는 촬영소 조감독 생활을 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해외파 조감독이었던 셈이다. 홍 감독은 후에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으로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과 맞대결을 벌이게 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다. 흥미롭게도 홍 감독과 신 감독은 최인규 감독의 울타리 안에서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다.

주한미국문화원의 협조를 받아 '국민투표'(1948)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동시녹음으로 찍고 있을 때의 일이다. 최 감독이 배우모집을 한다고 신문에 공고를 내도록 했다. 연출 ㆍ편집을 맡았던 양주남 선생이 동시녹음을 했고, 신인 여배우 최지애, 전택이, 박일룡, 구종석 그리고 김일해 등이 출연했다. 이때 신상옥은 신인배우로 응모를 했다. 원서를 본 최 감독은 "어, 얘 미술 했구나"하며 배우보다는 미술에 대한 이력에 관심을 보였다.

"얘는 배우보다는 연출부에서 미술이 좀 필요하니까 그 쪽으로 어떻게 해 봤으면 좋겠으니 본인한테 얘기해봐라." 그래서 신상옥에게 연락을 하니, 미술 쪽 일이라면 사양하겠다고 하며 본인은 꼭 배우가 되고 싶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최 감독의 뜻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신상옥을 설득해야만 했다. "나 같으면 일단 연출부에 들어오겠다. 들어온 다음 기회를 봐서 배우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네가 거절하면 기회는 영원히 없어지는 거야. 그러니 다시 한 번 생각해봐." 결국 그렇게 신상옥은 영화계에 입문하게 됐다. 그 때 내가 어르고 달래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돌이켜보면 드라마틱한 순간들이다.

최 감독은 신상옥에게 첫 번째 임무를 지시했다. '국민투표'의 홍보 포스터를 그리는 일이었다. 난 최 감독의 지시를 신상옥에게 전달했다. "거리에다 붙일 '국민투표'의 포스터를 몇 장 그려 오라고 하신다. 내일 아침 여덟 시까지 그려와. 내일 여덟 시부터 촬영이 시작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돌아 간 신상옥은 다음 날 여덟 시가 넘고 아홉 시가 지났는데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요샛말로 까칠한 최 감독,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최 감독은 옆에 항상 붙어있던 나를 공연히 걷어차면서 "너 분명히 여덟 시까지 그려오라고 그랬냐?"하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그렇게 어제 분명히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왜 안 오느냐?" 최 감독은 또 발로 차려고 하며 벼락 같은 호통을 쳤다. 나는 옆으로 피해 간신히 발길질을 모면할 수 있었다.

최 감독의 성격을 익히 잘 알고 있던 홍성기 감독은 벌써부터 저만치 피해있고, 변인집 촬영부 최고참은 고가의 미첼 카메라만 꼭 부둥켜안고 불똥이 튈까 조바심 치는 상황이었다. 오전 아홉 시가 넘어서야 신상옥이 종이를 말아 들고 휘적휘적 걸어 나타났다. 최 감독이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신상옥은 험악한 분위기를 알고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종이를 땅에다 슬며시 던져 놓고 피해버렸다.

최 감독은 종이를 펼쳐 보고선 안색이 변했다. "미술 했다는 놈이… 무슨 포스터가 이래!"하며 영 마땅치 않아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어 내키지 않는 포스터로나마 촬영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에피소드나 뒷날의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신상옥 감독이 미술을 전공했다는 이력은 여러 모로 미심쩍고 의문의 여지가 있다. 후에 신 감독과 함께 신필름에 적을 두었던 이형표 감독마저도 "(신 감독이) 미술을 한 거 같지 않아. 얘길 해 봐도 그렇고, 일본서 미술학교를 다녔다고는 그러는데 이 친구 그림을 하나도 보지 못했어"라며 석연치 않아 했을 정도였다.

미술전공 여부에 대한 의심뿐 아니라 신 감독은 이러 저러한 여러 석연치 않은 의혹들이 뒤따랐다. 그가 세우고 운영한 신필름을 둘러싼 여러 의혹도 그렇고, 남북한을 넘나들며 남긴 행적들도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신 감독의 몇몇 행적은 이번 회고록 연재 중 한 번쯤 짚고 넘어가게 될 것 같다.

'국민투표'(1948)이후 '독립전야'(1948)라는 영화 역시 미국문화원에서 협조해준 미첼 카메라로 동시녹음을 했는데, 최 감독이 직접 주인공 역할을 했고 여주인공은 최지애, 그밖에 황남, 전택이 등이 출연했다. 남대문에서 태평로 모퉁이 쪽에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가 있었는데, 그 안에 스튜디오와 세트를 지어놓고 열흘 동안에 완성했다. 아마도 한국영화사상 가장 빨리 완성된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 감독 작품 중에서 가장 최인규 작품답지 않은 실패한 작품이었다고 기억된다. 완성도에 있어 아마 최 감독 작품 중 최하위일 듯 생각된다.

'독립전야'의 제작이 끝나면서 홍성기 감독이 데뷔 작품을 준비했다. 고아원을 운영하던 황온순 여사가 자신의 자서전을 영화화 해달라고 의뢰했고 제작비 전액을 지원했다. 여성 보육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로 기록되는 16mm 작품 '여성일기'(1949)였다. 뒷날 스타가 되는 황정순은 이 영화로 영화계에 데뷔식을 치렀다.

홍 감독은 한국영화 전성기라는 1950~1960년 최고의 멜로드라마 감독으로 군림하면서 한국멜로드라마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 받는다. 초창기 한국 멜로드라마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이다. '별아 내 가슴에'(1958)를 비롯한 그의 멜로드라마 히로인은 김지미였고, 그는 영화에서 짝을 이뤄온 당대 최고의 배우 김지미와 결혼하면서 뉴스메이커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맞붙어 화제를 모았던 '춘향전'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홍 감독은 큰 타격을 받는다. 1961년 1월에 개봉한 '춘향전'과 '성춘향'의 흥행대결은 당대의 흥미진진한 화젯거리였다. 두 작품 모두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이며, 최인규 감독 문하 동인이면서 라이벌격인 홍성기, 신상옥 감독이 각각 자신들의 부인이자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 김지미, 최은희를 내세워 만든 영화란 점이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개봉 전에는 흥행의 귀재였던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더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열흘 늦게 극장에 걸린 '성춘향'에 관객이 몰리는 이변이 일어났다.

캐스팅에서 주인공 이 도령 역에 신인 신귀식을 내세운 '춘향전'이 당대의 스타 김진규를 내세운 '성춘향'에 밀렸다. 허장강과 도금봉 콤비가 보여준 코믹한 방자와 향단이가 '성춘향'에서 톡톡히 감초 역할을 한 데 비해, '춘향전'에서는 진지한 이미지의 김동원이 방자 연기를 맡아 어색했던 것도 실패의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한국 영화계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피 묻은 대결'이라던 춘향 혈투는 홍 감독의 참패로 끝났고 이 사건은 홍 감독에게는 정신적·경제적으로 치명적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1950년대를 기점으로 최인규 감독의 연출부였던 홍성기, 신상옥 그리고 나 정창화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데뷔를 하게 된다. 홍 감독이 '여성일기'(1949)로 데뷔했고, 신 감독은 '악야'(1952)로 데뷔했으며 나 또한 김성민 감독한테 시나리오를 부탁해서 데뷔작 '유혹의 거리'(1953)을 준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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