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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급할수록 딴 짓에 몰입하는 이상한 습관

입력
2014.08.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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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피아노에 온몸을 굵은 밧줄로 챙챙 휘감아 붙들어 매고 싶었다. 머릿속 잡념이 음악에의 몰입을 엉망진창으로 방해하고, 악기로부터 계속 튕겨나가려는 얍삽한 몸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벌건 녹이 쓰는 손가락이 그 욕구불만을 더했다. 두개의 스톱워치를 곁에 놓고 유혹을 제어했다. 잠은 토막토막 나누어 자되 휴식은 오로지 잠에 집중했다. 하루가 24시간이니 12시간은 꾸역꾸역 이렇게 채울 수 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권장할 방법은 아니다. 연주를 앞두고 부실한 준비가 역력할 때, 즉 망신살을 눈앞에 둔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꺼내 쓰는 비급이다. 어제 오후 5시부터 방금 전까지 동굴 속 ‘웅녀’마냥 그리 살았다. 사람을 만난 건, 냉장고에 마늘과 쑥갓(어이쿠!)을 채우기 위해 연습실을 내왕하신 아버지뿐이었다. 대망의 12시간 결승점을 지났다. 아, 곰이 사람으로 거듭나기가 얼마나 힘드냔 말이다.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면 일부러 어렵게 꼬아놓은 로그 방정식을 풀곤 한다는 수학자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문제를 집중해 풀다 보면 속세의 부침에 휘둘리지 않는 특별한 공간(혹은 시간)에 틈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가에게도 그와 같이 집중의 효용을 발휘할 만한 경우를 상정해본다면, 낯설고 어려운 악보를 꺼내 들어 악기 앞에 앉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이때 익숙하고 쉬운 곡은 피하는 것이 좋다. 머릿속 소음에 다시 압도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독서에서의 ‘통독(通讀)’은 음악의 ‘초견(初見)’에 해당된다. 처음 마주하는 악보를 연습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끝까지 연주하는 일을 의미하는데, 당연히 완성도와는 거리가 멀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마디까지 완주하려면 소심하게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보다는 ‘될 대로 되라’ 식의 무대포 정신을 갖춘 사람에게 더더욱 유리하다. 나의 경우 머리와 마음 속이 시끄러울 때면 유난히 샘솟아 마지않는 용기와 도전정신을 이 초견을 위해 종종 활용해보곤 한다.

베토벤의 함머 클라비어(Hammerklavier, Op.106) 소나타는 이제껏 엄두를 내지 못했던 작품이다. 32개의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기술적으로도 가장 어렵고, 제대로 된 이해와 해석이 도통 쉽지 않은 거대한 난공불락의 성으로 여겨지는 곡인 까닭이다. 말년의 베토벤은 이미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역경과 고난을 헤쳐오며 상처 입은 심성 역시 궂은살이 깊이 배겨 있다. 아무리 호기로운 무대포 정신으로 무장돼 있다 해도 통독을 통해 그 굴곡과 부침을 단번에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한껏 심호흡을 하고 악보를 펼쳐 들었다. 베토벤의 후기 작품들은 전적으로 ‘상상의 청력’에 의존해 작곡한 비현실적인 음악이었다. 쇠잔해지는 몸뚱어리와는 대조적으로 음악을 향한 창작 의지는 더할 나위 없이 격정적이고도 치열하다. 어찌 보면 요령부득의 통독에 불과했지만, 머릿속 소음은 확연히 고요해졌다. 일상의 폭풍우가 소소하게 무색해질 정도로 한 작곡가에 대한 경외는 그렇게도 강렬하다.

3악장에 이르렀을 때, 왈츠리듬의 간결한 반주음형과 대비되는 오른손의 격정적인 토로와 조우했다. 기본박과 엇갈려 머뭇거리는 내성의 움직임에 무엇보다 매료됐는데, 마치 생명을 유지하는 심장박동인 듯 느껴졌다. 주선율의 격한 토로와 무심한 듯 전개되는 반주를 중립적으로 중재하는 생명유지 장치의 초연함 같은 것. 4악장에는 고집불통의 푸가(Fuga) 주제가 등장한다. 타협하지 않은 불굴의 의지는 도처에서 날뛰는 트릴(trill)의 동력에 의지하고 있다. 화음의 격한 대립에 이어 나타나는 저음 음역의 선율선은 그 음정을 알아채기 힘들만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로 인도한다.

누군가 나를 마치 마리오네트의 인형처럼 노동하라 조종했으면 좋겠다. 삶을 지탱케 하는 힘은 어쩌면 자유의지를 상당부분 거세한 단순하고 강제적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에 휘둘리는 대신, 생각하기를 멈추며, 부단히 움직이는 것. 뇌가 출렁출렁 흔들린다 해도, 우선 손가락부터 조금씩 까딱까딱 움직여보는 거다. 함머 클라비어의 초견이 오늘 나를 구출했던 것처럼.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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