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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도시 테베, 야만과 문명 사이의 문지방

입력
2017.04.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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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아테네 비극은 ‘코라’의 은유

인간은 도시 통해서만 문화 성취

‘코라’ 도시-혼돈 사이 자궁 같은 땅

-그리스인 정체성의 뿌리 테베 신화

인간 내면 폭력 사유… 근친살해ㆍ상간 점철

페니키아 튀로의 왕자 카드모스

제우스에 납치된 여동생 유로파 찾다가

그리스 첫 도시 테베 건설, 문자 전파

1632년작 렘브란트의 '유로파의 납치'(The Abduction of Europa). 그림 왼쪽 아래 황소로 변한 제우스가 카드모스의 동생 유로파를 납치해가고 있다. 카드모스는 유로파를 찾아 서쪽으로 가 테베를 건설한다.
1632년작 렘브란트의 '유로파의 납치'(The Abduction of Europa). 그림 왼쪽 아래 황소로 변한 제우스가 카드모스의 동생 유로파를 납치해가고 있다. 카드모스는 유로파를 찾아 서쪽으로 가 테베를 건설한다.

‘도시’는 인간문명을 담는 그릇이다. 도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류는 20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로 등장하여, 동아프리카로부터 이주하여 중동과 유럽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사회를 구축한 것은 최근이다. 5,000년 전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도시는 문자라는 정교한 소통망으로 섬세하게 연결된 추상적인 공간이다. 도시가 몸이라면, 문자는 그 도시를 움직이는 이성이며 감성이다.

도시 밖, 도시를 감싸고 있는 자궁 ‘코라’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그리스어로 ‘쪼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이라고 정의하였다. 이 용어를 풀어 설명하자면 ‘도시라는 공간에서 활보하는 동물’이란 의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문화는 도시라는 공간을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었다. 도시문화란 공존하기 위해 인간들이 상대방에 대해 경청, 숙고, 배려, 수용 그리고 용서와 같은 탁월한 정신 없이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질서를 나타내는 도시 밖을 상징하는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플라톤은 물질세계의 체계에 관한 책 ‘티마이오스’에서 그 곳을 ‘코라’(chora)라고 불렀다. ‘코라’는 흔히 고대 그리스어에서 ‘도시를 둘러싼 열려진 공간’을 이른다. 그는 도시를 ‘질서’로, 도시에 멀리 떨어진 사막과 같은 장소를 ‘혼돈’으로 여기고 그 중간에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비한 땅을 ‘코라’라고 불렀다. 플라톤에 의하면 ‘코라’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공간으로, 비존재가 존재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무시무시한 장소다. 그는 코라를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기원전 5세기 고대 아테네에서 등장한 비극들은 대부분 ‘코라’에 대한 은유다.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을 통해 태어날 수 밖에 없듯이, 인류 문명의 총아인 도시도 ‘코라’를 통해 건설될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고대 그리스 비극들은, 아이스킬로스 ‘페르시아인들’을 제외하고 모두 신화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공간인 코라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스 이전, 테베를 찾아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들에게 ‘그리스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공동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다. 그들에겐 두 가지 이야기 전통이 있었다. 하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발견된 영웅이야기들이다. 그리스인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듣고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이 공동의 세계관이 그리스다. ‘일리아스’는 ‘명성’에 관한 찬양이다. 영웅 아킬레우스는 영웅의 최고의 가치인 ‘명성’을 위해 트로이 참전을 결정한다. 그는 명성이 그의 목숨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에 ‘오디세이아’는 ‘귀향’에 관한 노래다. 트로이전쟁에서 살아 남은 오디세우스는 20년 만에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나 왕국을 건설한다.

아테네인들은 트로이 전쟁이야기보다 더 근본적이며 오래된 신화를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테베’라는 도시를 둘러싼 이야기다. 테베 이야기는 인간이 야만에서 문명으로 이동하고, 들판에서 도시로 들어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 내면에 담긴 적나라한 이야기들이다. 인간이 좁은 공간에서 생존하기 위한 야만적이며 폭력적 이야기로 가득 차있다.

이 이야기는 찰스 다윈의 용어를 빌리자면 ‘손톱과 발톱이 피로 물든 동물’인 인간에 관한 관찰이자 반성이다. 테베 이야기는 부모살해, 형제살해, 근친상간 등 문명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제거해야 할 인간 내면에 숨겨진 폭력들로 가득 차있다. 신화에 의하면 그리스 최초의 도시 테베를 건설한 첫 번째 왕은 카드모스다. 카드모스는 그리스인들이 상상하는 영웅들의 원조로 헤라클레스가 등장하기도 전에 활동하였다.

제우스, 해상강국 페니키아에서 유로파를 납치하다

‘테베’를 건설한 카드모스는 누구인가? 그는 원래 레바논의 항구도시 튀로(Tyro) 출신이다. 기원전 13세기에서 9세기까지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던 국가는 페니키아다. 페니키아는 상선을 삼단노선으로 만들어 올리브오일, 와인 그리고 자주색과 분홍색 색감을 수출하였다. 튀로는 페니키아의 가장 번창했던 무역항이다.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은 페니키아를 인류 최초의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뽑았다. 페니키아는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히타이트, 동쪽으로는 아시리아 제국의 틈새에서 해상무역을 통해 막강한 부를 축적하였다. 카드모스는 해상강국 페니키아의 도시 튀로의 왕자다.

카드모스는 튀로의 왕 아게노르와 여왕 텔레파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드모스 여동생의 이름은 유로파다. 신화에 의하면 하늘 신 제우스는 유로파를 보고 한 눈에 반해, 그녀를 납치할 목적으로 스스로 황소로 변신하였다. 변신한 제우스는 유로파가 좋아하는 아게노르 왕의 다른 황소들 사이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어느 날 유로파가 시녀들과 함께 들판에서 꽃을 따다가 그 황소를 보고 올라타게 된다. 제우스는 그 순간에 유로파를 등에 업고 지중해로 뛰어들어 크레타섬에 도착한다. 그런 후 제우스는 자신이 하늘 신이라는 신분을 밝히고, 유로파는 크레타의 첫 번째 여왕이 된다. 이것은 크레타의 기원신화다. 이것은 크레타를 넘어 그리스와 ‘유럽’, 즉 서양 탄생에 관한 신화다.

해가 지는 서쪽을 뜻하는 이름, 유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기원전 12세기에서 8세기까지를 암흑시대라고 말한다. 기원전 12세기 이전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한 미노스 문명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부의 미케네 문명이 꽃피웠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이들 문명은 사라지고 기원전 750년경, 그리스 본토에서 다시 문명이 등장하였다. 고대 그리스 신화기록자들은 크레타 문명의 시조를 페니키아 출신 유로파로 설정한 점이 흥미롭다.

인도-유럽학자들은 ‘유럽’(Europe)이란 단어의 어근을 오랫동안 추적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유럽’의 원래 의미를 페니키아가 속한 셈족어(히브리어, 아랍어 등에 속한 언어군)에서 찾았다. ‘유럽’과 같은 자음을 지닌 페니키아어 ‘에렙’(ereb), 히브리어 ‘에렙’(ereb), 아랍어 ‘아라바’ 등이 모두 ‘해가 지다’ 혹은 ‘해가 지는 방향; 서쪽’이란 의미다. 페니키아에서 바라보면, 크레타 섬이나 그리스 반도는 ‘서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을 ‘서쪽에 위치한 땅’이란 의미의 ‘유럽’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담은 이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기원신화인 제우스-유로파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동쪽에서 온 카드모스, 그리스에 문자를 전하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카드모스는 납치된 유로파를 찾기 위해 그리스 반도로 갔다가 그리스 반도 중부 보에티아란 지방에 한 도시를 건설한다. 이 도시 이름이 ‘테베’다. 카드모스, 오이디푸스, 디오니소스에 관련된 신화들은 모두 이곳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테베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비극이 시작될 때 건설된 아테네와는 달리, 그리스의 기원과 관련된 까마득한 전설들로 둘러 쌓인 곳이다.

고고학자들은 카드모스가 건설했다는 성벽과 아크로폴리스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테베의 전설적인 창건자 카드모스의 이름을 따 ‘카드메아’(Cadmea)라고 불렀다. 이곳은 기원전 14세기, 미케네 시대부터 거주하던 청동기시대 성벽이다. 카드메아는 후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같이 기능했다. 테베에는 제우스의 아들인 암피온이 지었다는 7개 성문 신화가 있다. 이 신화는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의 배경이 된다.

카드모스는 이곳에서 페니키아 알파벳을 가르친다. 고대 그리스 알파벳은 페니키아 알파벳에 모음 몇 개와 자신들의 발음에 필요한 몇몇 자음을 첨가하여 창제되었다. 호로도투스는 ‘역사’에서 “카드모스와 함께 온 페니키아인들이 그리스에 소개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문자다. 그 당시까지 그리스인들은 문자를 몰랐다”라고 증언한다. ‘카드모스’라는 이름도 셈족어다. 셈족어로 ‘카담’이란 의미는 ‘동쪽; 동쪽에서 온 자’라는 의미다.

테베의 탄생을 둘러싼 이야기는 기원전 2,500년 동안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에서 숙성된 문명이 그 중심지를 그리스 본토로 옮긴 사건을 담고 있다. 아이스킬로스가 기원전 467년 아테네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무대에 올린 비극,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 이야기는 그리스 탄생에 관한 폭력적인 이야기다. 그리스인들은 ‘아테네’를, 무시무시한 ‘코라’라는 공간을 통해 찬란한 문명을 탄생시키는 작업을 비극을 통해 시도하고 있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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