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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택배를 받으며

입력
2017.06.1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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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다닐 당시 나는 주로 온라인 서점에 책을 주문하여 택배로 받았다. 출근길이 힘들게 느껴지다가도 오늘 새 책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즐거워지던 때였다. 책의 구매처와 배송회사가 일정한 패턴을 갖게 되면서 배송기사도 늘 오는 사람이 왔다. 나는 그에게 수고스럽게 사무실 내 자리까지 오지 말고 건물 입구 우편함에 놓고 문자만 달라고 부탁했다. 책 한 권쯤 잃어버려도 좋고 그걸 가져가는 사람이 생기면 독서 인구가 하나 느는 것이니 어느 면으로 보나 나쁜 점이 없었다.

서로 잘 알고 지내게 되자 어떤 날은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서 배송기사를 만나 책을 받은적도 있었다. 출장으로 자리를 비우면 우편함에 책이 쌓이는 걸 보다 못한 경비실에서 맡아주는 경우도 있었는데, 잃어버려도 좋으니 신경 써서 챙기지 마시라고 부탁 드렸다. 최근 경비 업무에 택배 받는 일을 정식으로 포함시키려는 법안이 추진될 뻔했는데, 결국 안 됐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을 텐데, 사회적 약자 입장에서 처리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정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그것이 복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많이 가진 사람에게 약간의 불편에 그칠 일도, 덜 가진 사람에게 엄청난 고통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고통을 덜기 위한 쪽으로 결정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급해 보이는 구급차를 양보해주는 일은 약간 불편한 일이지만 구급차 안의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불편이라 느껴지지도 않는다.

회사 업무상 퀵서비스도 많이 이용했다. “퀵인데요” 하는 전화가 오면 어떤 일을 하다가도 바로 건물 밖으로 달려나갔다. 기사가 나를 찾아서 사무실까지 오는 일은 없게 만들었다. 내가 보낼 때도 기사가 도착하기 전에 발송 준비를 마치고 기다린다. 그들에겐 시간이 돈이다. 안전모를 쓰고 출발하려는 기사에게 당부한다. 빨리 배송 안 되어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안전하게 가시라고. 그리고 정해진 요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드렸다. 가끔 회사에 상품 견본이 남으면 드리기도 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그리 행동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다른 이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고 싶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내게 되돌아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에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존경하는 한 선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순수한 자신의 노력으로 중견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 거래처와 술을 마신 뒤 대리운전을 이용하여 집으로 가게 되면, 대리기사에게 팁을 꼭 준다고 한다. 선배는 그 팁을 응원의 격려금이라고 생각한단다. 사회의 선순환은 이런 일에서 생성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작은 배려가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을 받는 청년들 앞에 서면 가장 겸손하게 주문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아이도 커서 이 청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아이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우리 아파트에는 택배 차가 들어오지 말고 뛰어다니면서 배송하라고 하고,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눈을 부라리며 문을 쾅 닫는 그런 세상을 유산으로 남길 텐가.

어떤 노동에 경의를 표해야 할까. 그 선정 기준은 매우 간단하고 쉽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고 존중하면 된다.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게 사는 방법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타인의 인생에 잠시라도 넘어가 보는 것이다. 택배를 건네는 그 손을 바라본다. 얼마나 많은 문을 두드렸으면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겼을까. 그 굳은살만큼 단단하고 넉넉한 인생이 되기를 소원하며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 지기를 기다려 대문을 닫는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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