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행동 보이던 서울 85세 노인
지자체서 법원에 요청 가능하지만
"관련 지침이 없다" 1년째 외면
환청 등 생활 불가능해 결국 입원
쓰레기가 집안 곳곳에 널려 있고, 바퀴벌레들이 그 틈을 헤집고 다녔다. 냉장고에는 부패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85세 노파는 집에서 외출용 신발을 신은 채, 과자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지난해 6월 서울의 한 복지관 직원들이 이상 행동을 보인다는 신고를 받고 할머니 A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광경이다.
이후 A씨는 노인성 치매 판정을 받았고, 환청ㆍ망상ㆍ환각 증상도 있어 독거로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 입원하게 됐다. 하지만 A씨는 복지의 손길이 필요한 저소득 독거노인은 아니다. 서울 여의도 아파트 등 20억원 상당의 자산이 있다. A씨는 이북 출신으로 6ㆍ25 당시 인천에 혼자 정착해 결혼하지 않고 돈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현재 자산 관리는커녕 공과금 납부도 못하는 처지다. 매달 300만원 가량 입원 치료비도 빚으로 쌓였다. A씨가 약 2억을 받고 전세를 놓은 아파트 임대차 계약 만료가 1년도 채 남지 않아 세입자는 돈을 돌려 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2년 전 도입된 성년후견인제도만 이용하면, A씨는 성년후견인을 지정 받아 자신의 자산으로 법률조력과 실생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성년후견제란 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의사결정이나 사무처리가 어려운 성인이 가정법원의 결정으로 후견인을 선임해 재산 관리나 일상생활에서 보호를 받게 하는 제도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친족 중 후견인을 결정하는 기존 금치산ㆍ한정치산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2013년 7월 도입됐다. 본인, 친족, 지방자치단체장, 검사가 가정법원에 성년후견개시 심판을 청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지역 치매 독거노인 등에 대해 사정을 잘 아는 지자체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A씨의 경우 지자체장이 성년후견인 선임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는데도 1년 째 외면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13일 한국성년후견지원본부(이하 후견지원본부)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후견지원본부는 지난해 10월 관할 구청을 찾아 A씨를 위한 전문 후견인 선임을 법원에 청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계속 거절당했다.
김효석 후견지원본부 교육ㆍ연구위원은 “처음에는 ‘예산이 없어 못한다’고 난색을 표했다가 이후 관련 비용을 우리가 댄다고 하니 그때는 ‘관련 지침이 없다’며 할머니의 극한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해당 구청의 어르신 행정팀장은 “발달장애인에 대한 처리 지침은 있지만 할머니 사례 같은 노인에 대한 행정 방침은 보건복지부의 지침이 없기 때문에 구청도 임의대로 하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복지부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후견인 선임은 발달장애인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돼 적용이 가능하지만, 노인에 대해서는 적용을 검토 중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독거ㆍ치매노인 후견수요가 있고, 그 필요성도 있다”며 “이달 안에 전문가 자문과 연구용역에 착수해 관련 사업을 설계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성년후견심판 사건을 맡았던 판사 출신 이현곤 변호사는 “인지대 몇 만원과 20만~40만원 정도의 정신감정비 신청 비용 때문에 지자체가 관할 주민의 곤경을 외면해선 안 된다”며 “법원이 소송부조결정으로 지원해줄 수도 있고, 관련 단체 지원을 받는 등 해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후견지원본부는 14일 상임이사회 의결을 거쳐 지자체 대신 서울중앙지검에 후견심판개시 청구를 해달라고 협조요청하기로 했다. 검찰은 지난달 24일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유기하고 재산을 빼돌리는 딸을 대신해 변호사 등 제3자를 후견인으로 선임해달라며 법원에 처음으로 성년후견을 청구한 바 있다. 손현성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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