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노풍(盧風)’이지만 당시는 ‘이풍(李風)’이었다. 진짜 ‘이주일 바람’이 거셌다.3월11일 선거운동 이틀 만에 2,000여 명의 당원이 모였고, 7,000여 명의 자원봉사자와 후원회 회원들이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14대 총선 후보등록일 전날까지만 해도 100여 평짜리 사무실에 휑하니 전화기 20대만 갖춘 나였는데 말이다.
말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풍’과 ‘이풍’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바람 모두 서민층에서부터 불어왔다.
서민들 눈에 상대 후보가 밉게 보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잘난 체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묵묵히 낮은 자세로 있는 사람에게 동정표가 몰리는 사회다.
비록 민주당 국민참여 경선이 당원들의 잔치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민주당 경선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고 본다.
1996년 4월 15대 총선 때 후배 이덕화(李德華)가 경기 광명시에 출마한 적이 있다. 나는 당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이덕화에게 충고했다.
“제발 화려한 연예인 티를 내지 말라”고. “많이 걷고 많이 신경 쓰고 그러면서 물은 절대 먹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입술도 부르트고 눈도 충혈돼 동정표를 받을 수 있다. 되도록 연예인도 유세장에 부르지 마라. 주인공이 희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덕화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가발에 무스까지 바르고 셔츠는 칼 주름을 잡았다.
내가 “무슨 영화 찍냐?”고 핀잔을 줘도 말을 안 들었다. 그가 아는 연예인은 죄다 불러 옆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그리고는 똑 떨어졌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구석이 있어야 찍는다.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져야 표를 주는 법이다. 시도 때도 없이 똑똑하기만 해서는 거부감만 생긴다.
내 선거유세 때는 친구 박종환(朴鍾煥)을 제외하고는 다른 연예인은 거의 부르지 않았다. 화려한 연예인 얼굴에 괜히 유권자 시선만 분산되기 때문이다.
한번 더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면 진짜 멋있게 뛸 자신이 있는데….
나 역시 동정표 덕분에 14대 총선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핍박 받는 이미지가 알려진 후 동정표가 몰려든 것이다.
물론 언론과 안기부와 여당도 큰 몫을 했다. 출마와 관련한 외압 논쟁으로 인해 내 선전은 언론이, 내 선거관리는 안기부가, 내 선거 지원은 여당이 한 꼴이 됐다.
법정선거운동 기간인 14일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니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은 일이다. 과거 2주일 만에 연예계 스타가 됐듯이.
후보 등록을 하고 나자 여당에서는 나를 죽일 듯이 대했다. 매일같이 안기부 직원을 구리로 출근시켰다. 방해공작도 폈다.
자고 일어나면 ‘이주일이가 전신마비에 걸렸다’ ‘출마를 포기했다’는 내용의 유인물이 아파트 단지에 좍 깔려 있었다.
내 운동원들까지 일일이 감시했다. 내가 운영하던 이태원 캐피탈호텔 나이트클럽 등 4개 업소 문을 닫은 것은 물론이다.
나는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정말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하루에 잠을 2시간만 잤다. 어찌나 많이 걸어 다녔는지 무릎에 물이 차기 시작했는데 잠을 자는 동안 이 물을 빼고 마비된 손을 주무르곤 했다.
선거운동 때 나만큼 이리저리 뛰어다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뛴 내가 이 암 하나 못 이기겠는가. 난 이 암을 이길 자신이 있다.” 난 내가 병석에서 일어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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