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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할일 다 했으니 떠납니다”…노무현ㆍ문재인 측근 이호철

입력
2017.05.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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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이호철(왼쪽),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한 이호철(왼쪽),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제가 존경하는 노변과 문변, 두 분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이만한 명예가 어디 있겠습니까. 정권교체는 이루어졌고 제가 할 일을 다한 듯 합니다. 마침내 저도 자유를 얻었습니다. 저는 권력이나 명예보다 자유롭기를 원해 왔고, 저의 자유를 위해 먼 길을 떠납니다.”(인천국제공항에서 이호철)

새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 10일 오후, 참여정부 인사였던 윤승용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페이스북 계정엔 이호철(59)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출국에 앞서 지인들에게 보낸 글이 전해졌다. 이 전 수석은 과거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인물이다.

정권교체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새 내각구성이 발표되는 상황에서, ‘문재인의 3철(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호철 전 수석,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라 불릴 정도로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던 그가 자취를 감추면서 주목 받고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어김없이 한자리 차지하려 하는 정계의 속성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 수석의 과거를 살펴보면, 그가 민주화 운동의 지주이자 동지였던 전ㆍ현직 대통령들을 위해 스스로 떠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민주화운동으로 청년기를 보낸 ‘부림사건’ 피해자

이 전 수석은 부림사건 피해자로서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림사건은 앞선 전두환정권이 1981년 부산지역 대학생ㆍ교사 등 22명을 ‘불온서적을 읽고 이적활동을 했다’고 낙인 찍은 사건이다. 당시 정부는 같은 해 4월과 6월 발생한 부산대 학생시위를 주도한 게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이 전 수석이라고 지목하면서 그와 관련된 부산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의도적으로 조작했다. 검찰은 영장도 없이 당사자들을 구속한 뒤 일명 ‘통닭구이’ 등 끔찍한 고문으로 자백을 받는 등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으로 몰았다. 이 사건은 영화 ‘변호인’에서도 소개됐다.

사실 이 전 수석이 처음으로 노 전 대통령을 만난 건 부림사건이 아닌 1982년 3월 발생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재판이었다. 부산 대학생들이 미국 정부가 5ㆍ18 광주민주화운동당시 학살을 용인했다며 불을 지른 사건이다. 이 재판으로 인연을 맺은 노 전 대통령은 이 전 수석이 부림사건 3차 구속자가 된 이후까지 무료변론을 했다. 이 전 수석은 결국 징역 4년형을 선고 받고 실형을 살다 같은 해 12월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의 포스터. 위더스필름 제공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의 포스터. 위더스필름 제공

평범한 변호사였던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구치소에서 피투성이가 돼 있던 이 전 수석을 접견하며 현실에 눈을 떴다고 한다. 젊은 학생들이 직장이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석방된 이후에도 두 사람은 꾸준히 교류했고, 그가 건네준 민주주의 관련 서적을 노 전 대통령이 탐독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선 이 전 수석이 선배였다고 한다.

이들의 인연은 1985년 부산에서 결성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에서도 이어졌다. 그 해 2월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압승을 계기로 결성된 부민협에 당시 노무현ㆍ문재인 변호사 등은 운영위원으로, 이 전 수석은 실무간사로 동참했다. 운영위원들은 재정적ㆍ법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시위 중 연행된 회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밤중에도 유치장에 달려갔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이 전 수석과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동지’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의 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점에 이른다.

“나는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니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어온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도움으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당선, 정치에 입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전 수석은 정치판과 거리를 뒀다. 선거철이나 노 전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경우에만 잠시 측면에서 도움을 줬던 게 전부였다. 1988년 ‘5공 청문회’의 정치적 변질을 개탄한 노 전 대통령이 의원직 사퇴를 만류하는 과정에서도 이 전 수석의 행보는 동일했다. “나는 정치를 할 사람이 아니다”, “노짱 옆에 있으면 돈벌이를 할 수 없다”는 이유와 함께 결국엔 생업인 여행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전 수석도 청와대에 입성한 ‘노짱’이 도와달라며 불렀을 때는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노 전 대통령은 강직한 성격의 이씨를 국민여론 동향을 보고하고 측근 비리를 감시하는 민정수석실 민정1비서관에 앉혔다. 당시 그 역시도 “이번엔 일에 만족하는 한, 있으라고 할 때까지 있어보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하지만 동지를 곁에 둔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386세대 젊은피를 수혈하겠다던 인선이 오히려 ‘코드인사’로 비춰진 것이다.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을 비롯한 부산출신 인사들은 ‘부산파’라 불리기도 했고, 이 전 수석에게는 이에 더해 ‘운동권 라인’이라는 이중 굴레가 씌워졌다. ‘아마추어’ 논란도 문제를 키웠다. 노무현 정부 첫 인사 당시 38명의 비서관 중 2명을 제외한 36명이 모두 비관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비서관 중 절반 이상이 정부 부처 출신이었던 김대중 정부 때와도 비교됐다.

이후 2003년 노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가 대우건설 사장인 고 남상국씨의 청탁을 받고 3,000만원을 수수한 사건, 2004년 건평씨의 처남 민경찬씨의 사설 펀드 모금 의혹 등 친인척 비리 의혹이 잇따라 붉어지면서 ‘코드 인사라 측근비리를 감시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2004년 3월 당시 야당이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등의 주도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정치권이 측근 참모들의 사퇴를 거세게 요구하자 이 전 수석을 비롯한 참모들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전 수석은 이후, 다시 노 전 대통령의 부탁을 받아 민정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대통령의 퇴임 이후에도 봉하마을로 내려가 그를 보좌했다. 하지만 2008년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인 ‘e지원’의 복제 시스템을 봉하마을에 설치한 경위를 둘러싼 국가기록물 무단 유출 조사, 나아가 ‘박연차 게이트’ 수사 등이 이어지면서 측근으로서 그의 보좌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이호철(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전 수석을 비롯한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이 2014년 1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김해=연합뉴스
이호철(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전 수석을 비롯한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이 2014년 1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있다. 김해=연합뉴스

“삼철로 불리우는 우리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이 전 수석은 이후 ‘문재인의 사람’이 된다. 그와 함께 노무현재단에 몸 담았던 이 전 수석은 문 대통령이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부산 사상구 후보로 출마할 때 캠프 참모의 맏형 역할을 한다.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도 후원회의 운영위원을 맡아 문 후보를 도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사후 민주당 내부에서 반복된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 논란이 늘 발목을 잡았다. 2012년 총선 공천에서 밀려난 한광옥 당시 민주당 상임고문은 친노패권주의를 탓하며 탈당했고, 2012년 대선 과정에선 당시 문재인 선거캠프 내부 ‘3철’의 입김이 캠프 공식 결정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지적도 나왔다. 때문에 당시 대선 직전 이 전 수석 등은 “문재인 승리의 노둣돌(말을 오르내릴 때 밟기 위해 놓은 큰 돌)이 되겠다”며 사퇴하기도 했다. 하지만 계파 논란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로 있던 2015년 12월 최측근에게 총선 불출마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 전 수석은 사실상 당시 정치권을 떠나있었음에도 약속을 했다.

이런 과정을 몸소 겪었던 만큼 이 전 수석은 이번 장미대선에서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선거캠프에 참여하긴 했지만 공식 직함 없이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에서도 그의 청와대 재직 당시 사건들을 끄집어내 추궁하는 정치공세는 계속됐다.

마지막 서한에서 밝힌 대로 이 전 수석이 “올해 초 캠프에 참여하면서 비행기표를 미리 예약”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삼철로 불리우는 우리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문 후보가 힘들고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곁에서 묵묵히 도왔을 뿐입니다”라는 회한도 보였다. 20대 때부터 함께한 문 대통령의 곁을 스스로 떠난 그는 “머지않아 돌아와 문재인 정부에서 깨어있는 시민으로 벗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란 말을 남겼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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