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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 소송 못합니다

입력
2016.10.0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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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소개로 상담을 위해 온 손님과 이야기를 시작하려다 소송 상대방이 누구인지 파악한 나는 난색을 표했다. “저 죄송하지만, 이 소송은 맡을 수 없습니다.” 의뢰인이 물었다. “우리가 상대하는 회사와 변호사님 사이에 어떤 계약이 맺어져 있나요?” 나는 구체적인 설명은 못하고 “그건 아니구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떻든 사건수임을 거절했다. 그 소송은 철도청(코레일)을 상대로 하는 소송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철도원으로 평생 근무하다 정년퇴임하셨다. 아버지도 철도원으로 정년퇴임하셨고, 어머니도 한 때 철도원이셨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꽤 오랫동안 몸이 안 좋아서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 건강이 워낙 안 좋으니 항상 집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우울한 우리 가족에게 숨통을 틔울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주말 기차여행이었다. 말이 거창해 기차여행이지 온 가족이 기차 타고 밀양역에서 부산역까지 가서 빵 사먹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그 시간은 언제나 기다려지는 소중함 그 자체였다.

6학년 초여름 어느 일요일. 그날도 가족여행을 마치고 밀양역에서 내렸다. 기차는 다시 출발. 그런데 우리로부터 30m 정도 떨어진 곳에 한 할머니가 아직 기차 난간에 발을 올리지 못한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어!’하고 소리쳤지만 멍하니 쳐다 보고만 있었다. 그때,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가던 아버지가 할머니 쪽으로 달려갔다. 어머니가 옆에서 소리쳤다. “가지 마이소!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이. 가지 마이소!”

내가 주로 기억하는 아버지 모습은 방에 누워있거나 힘없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런데 할머니에게 달려간 아버지는 할머니를 뒤에서 손으로 받친 다음 난간으로 힘껏 들어 올렸다. 할머니는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올라탈 수 있었고, 아버지는 발을 헛디뎌 플랫폼에 넘어졌다. “내가 못 산다카이. 큰일날 뻔 했잖소? 다치믄 우짤라꼬 힘도 없는 사람이….” 어머니는 울먹이면서 아버지를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는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는 “괜찮다. 손님이 사고 나믄 안 된다”고 말했다. 항상 무기력해만 보이던 아버지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니.

아버지는 틈만 나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성아. 철도가 얼마나 고마운지 니는 알아야 한데이. 내가 몸이 안 좋아 제대로 출근 못해도 정년까지 돈 벌게 해 준 곳이다. 니 장학금도 대주고. 진짜 우리 집안의 은인이다.” 술만 마시면 이런 말씀도 하신다. “참 이상하재. 어딜 가더라도 기차만 보이면 마음이 편하네.” 나는 속으로 ‘우리 아버지, 진짜 못 말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변호사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즈음, 어느 날 아버지가 부탁이 한 가지 있다고 했다. “우성이 네가 앞으로 변호사를 하다 보면 별의별 사건을 다 맡을 건데, 절대 철도를 상대로 싸우면 안 된다. 이거 하나만 약속해라. 철도는 우리 은인이다. 알겠나?”

아버지 말씀이 얼마나 진심에서 우러난 것인지 잘 알기에 나는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내가 철도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지 못하는 이유, 민사소송법상 회피나 기피사유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민사소송법보다 더 무서운 바로 ‘아버지법’ 때문이다.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자신이 몸담았던 직장에 대한 애정의 깊이도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네 아버지 세대는 당신들이 몸 담았던 직장에 대해 선지극한 애정을 갖고 있다. 당신들의 소중한 추억이 고스란히 그 곳에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더 이상 현역일 수 없지만 언제나 마음만은 현역처럼 내가 몸담았던 직장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우리 아버지들.

그 분들의 피가 우리의 그것보다 뜨겁지 않으리라 단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분들도 다 털어놓지 못한 가슴 속 뜨거운 이야기가 있을 것이기에….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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