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서강 기자

김주영 기자

등록 : 2017.09.14 04:40
수정 : 2017.09.14 13:54

역사 사라지는 인사동… 52년 노포도 떠납니다

<View&>상업화 물결 덮친 인사동의 현실

등록 : 2017.09.14 04:40
수정 : 2017.09.14 13:54

1965년부터 52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고(古) 시계점 ‘용정콜렉션’이 19일 인사동을 떠나 강남구 역삼동으로 이전한다. 부친으로부터 가업을 물려 받은 김문정 대표는 “내가 아니라 인사동이 변해서 떠나야 한다니…”라며 가슴 아파했다. 8일 부친의 사진을 들고 사라질 점포 앞에 선 김 대표 주변으로 무심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인사동 ‘용정콜렉션’의 간판.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글씨가 1965년 시작된 점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용정콜렉션’에 진열된 빈티지 회중시계.

8일 이전 작업이 서서히 진행 중인 인사동 ‘용정콜렉션’.

인사동에서만 30년을 이어온 ‘송림당필방’ 진열장에 ‘점포정리’ 안내문이 붙어 있다. ‘신용본위’를 고집스럽게 앞세웠던 이 전통 점포는 30일 폐업할 예정이다.

‘송림당필방’의 내부 모습. 목재 선반 등 30년 된 내부 장식이 고색창연하다.

#용정콜렉션(19일 이전 예정)

“지금의 상업화된 인사동은 생각도 하기 싫을 것 같다.” 서울 인사동에서 고(古)시계점 ‘용정콜렉션’을 2대째 운영해 온 김문정(46) 대표가 12일 금장 회중시계를 포장재로 싸며 말했다.

1965년 터를 잡은 부친이 32년, 김 대표 본인이 20년간 지켜온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34번지’를 19일 완전히 떠난다. 1980년대 ‘롤렉스’부터 200년이 넘는 장인의 작품까지 천여 점의 빈티지 시계가 간직해 온 긴 시간의 역사도 함께 역삼동으로 ‘이전’하게 됐다. 김 대표는 “부모님이 쓰던 예물시계를 자녀들이 가져와 수리해서 쓰다 아이들에게 다시 물려주곤 한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값진 추억의 장소 ‘인사동 용정’을 이어가지 못해 슬프다”고 말했다. “내가 아프거나 망한 게 아니라 이곳이 너무 변해서 떠나야 한다니…” 말을 잇지 못하는 김 대표의 얼굴은 이전 준비로 어수선한 점포 못지않게 심난했다.

#송림당필방(30일 폐업 예정)

인사동에 자리 잡은 지 30년 된 ‘송림당필방’도 30일 문을 닫는다. 11일 필방 진열장엔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붓, 벼루와 함께 ‘점포정리’ ‘Clearance Sale’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점포로 들어서니 빛 바랜 민속화 병풍과 목재선반 등 내부 장식마저 고색창연하다. 장종수(75) 대표는 “요즘 서예 가르치는 학교가 드물 정도니 장사가 통 안 돼서 문을 닫기로 했다. 단골들이야 섭섭하겠지만 어쩌겠나. 나이도 많이 들고… 이제 그만 쉬어야지”라고 말했다.

2대째 운영한 고시계점 ‘용정콜렉션’

높은 임대료 피해 19일 이사

30년 역사 ‘송림당필방’도 30일 폐업

수십 년 명맥을 이어 온 전통 점포들이 인사동을 떠나고 있다. 거리엔 이미 국적불명의 액세서리와 기념품 판매점이 즐비하다. 본보 뷰엔(View&)팀이 인사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인사동길 양 옆 1층 점포를 전수 조사한 결과 11일 현재 영업 중인 150개 점포 중 화장품이나 의류처럼 전통과 무관한 업종이 64곳에 달했다. 반면, 서예도구나 골동품과 같은 인사동 고유 품목을 고수하고 있는 점포는 59곳에 그쳤다. 나머지 27곳도 전통, 비 전통으로 나누기 애매한 잡화 또는 기념품 매장이 대부분이었다.

전통 품목은 안쪽에 두고 점포 앞에선 열쇠고리나 양말 등을 파는 변칙 영업도 15곳에서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인간문화재 작품이 진열된 도예점 앞은 스카프를 고르는 중년 여성들이 몰려 있기도 했다. ‘OO표구’ ‘OO화랑’ 간판을 달고 값싼 기념품이나 여성 의류를 파는 경우도 상당수였다.

1층 점포 150곳 전수 조사

전통 무관ㆍ변칙 영업 점포가 79곳

상황이 이런데도 인사동 문화지구 관리 주체인 종로구의 단속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종로구 관계자는 “비 권장 업종에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이 마련된 2013년 이전 들어선 점포는 단속이 불가능하고 그 이후 들어선 점포라도 단속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과태료를 부과하기가 애매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정용호 인사 전통문화보존회 회장은 “문화지구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상황이지만 아직 맥은 살아 있다. 더 망가지기 전에 인사동의 풍경을 하루 빨리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보존회는 10월 28일부터 7일간 인사동 박람회를 개최해 인사동의 원래 모습을 알릴 계획이다.

1998년 점포 앞에 도자기가 진열된 모습(흑백 사진)과 화장품 매장이 들어선 현재 인사동 거리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전시회 홍보 현수막이 빼곡하게 내걸린 1996년 인사동 풍경(왼쪽)과 현재. 당시 현수막을 내걸었던 화랑 대다수가 치솟는 임대료와 무관심을 견디지 못해 큰길에서 골목으로 이전하거나 아예 인사동을 떠났다.

11일 인간문화재의 도예 작품이 진열된 인사동의 한 도예점 앞에서 중년 여성들이 점포에서 내 놓은 스카프를 고르고 있다.

11일 인사동의 한 도예점. 안쪽엔 도자기를 놓고 점포 앞에선 열쇠고리와 스카프 등을 판매하고 있다.

#내가 인사동을 떠나는 이유

김문정 대표에게 인사동은 ‘내 평생 추억의 장소’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살다시피 한 인사동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차근차근 들려줬다.

1. 자존감만은 지키고 싶었다

“이거 진짜예요, 가짜예요?” 5년 전 불쑥 찾아온 젊은 커플 고객의 질문에 김 대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진짜예요’라고 대답하는 게 더 웃길 것 같았다. 2대째 이어온 가업을 짝퉁 취급하는 것 같아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그는 과거 인사동을 '점포마다 지닌 역사와 사연을 바탕으로 고급 전통문화를 향유하는 곳'으로 기억했다. 골동품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안목을 지닌 고객도 많았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 관광객이 몰리면서 인사동만의 독특한 문화와 고객들이 함께 사라져 갔다.

2. 천정부지 임대료

“중심가 열 평짜리 점포가 보증금 1억~1억5천에 월세 500만~600만원 정도니 인사동만 고집할 수 없었다.” 김 대표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인사동은 머물며 즐기기 보다 종로와 삼청동을 잇는 통로가 됐고 지나치는 관광객을 끌 만한 값싼 기념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 될수록 임대료는 치솟았고 감당 못하는 점포는 골목으로 옮기거나 문을 닫아야 했다. 김 대표는 “필방에서 중국산 기념품 파는 것도 다 임대료 때문”이라고 말했다.

3. 고령화 된 상인들

이 같은 상황에서 전통 점포를 지켜 온 상인들은 대부분 고령이라 점포 유지조차 쉽지 않다. 김 대표는 “인건비 버는 셈치고 나오는 어르신들의 경우 임대료가 오르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기보다 가게를 접는 편을 택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4. 연쇄적 불안감

김 대표는 지난달 20여년 된 다기 전문점 ‘동양다예’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느 점포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상인들은 연쇄적으로 상실감과 불안감에 빠져든다”고 했다. 인사동에서 15년째 한정식 전문점 ‘뜰아래’를 운영해 온 장병갑(55) 사장은 “인사동이 원래 전통과 고객, 음식이 잘 어울려 온 곳인데 지금은 전통이 안 되니 식당도 어렵다. ‘동양다예’에 이어 ‘용정’마저 문을 닫는다니까 우리도 이제 나가야 될 모양”이라며 한숨을 지었다.

<인사동 문화지구>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역사문화자원의 관리 및 보호를 목적으로 2002년 지정됐다. 문화지구로 지정된 서울 인사동과 관훈동, 낙원동 일대 17만 5,000㎡ 의 구역 내에서는 업종이 제한된다. 중심거리로 지정된 구간의 경우 골동품점 표구점 등 전통문화 관련 권장업종만 들어설 수 있으며 비권장 업종인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등을 파는 행위는 불법이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20여 년 된 다기 전문점 ‘동양다예’가 빠져나간 자리에 의류 매장이 들어서 있다.

‘송림당필방’ 내부에서 바라 본 인사동 거리.

인사동 ‘용정콜렉션’ 출입문에 걸린 영업종료 안내판.

11일 이전 작업이 한창인 인사동 ‘용정콜렉션’의 셔터가 내려져 있다. 52년 노포가 사라지고 나면 그 자리에 어떤 점포가 들어설 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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