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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문자 테크놀로지 어디로 가야 하나

입력
2017.03.0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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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출판 제의를 받았다. 청소년을 위한 건축 책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집필하지 못했다. 책을 쓰려는 의도가 너무 달랐다. 논리적인 글쓰기를 통해 단어와 단어가 촘촘하게 연대하는 지식을 담자고 하는 내게, 출판사 직원은 “그런 책은 집중해서 읽어야 하잖아요?” 라고 되물었다. 그 말에 좀 놀랐는데, 지식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면서 화면처럼 빠르게 넘길 수 있는 정보 위주의 책을 선호하는 현실이 담겨 있었다. 지식이 사유를 잃고 정보가치로만 존재하는 시대다.

지식을 구성하는 문자는 기본적으로 테크놀로지다. ‘지중해의 기억’을 쓴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생각이다. 이 말의 옳고 그름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자 출현 전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타인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은 문자 덕분이다. 기억의 공유 능력이 커지면서 도구 제작 능력이 향상됐고, 통치자의 의사를 멀리까지 전달하면서 국가도 등장했다. 문자는 어떤 기술보다 뛰어난 테크놀로지다. 그러니까 출판사에서의 대화는 ‘문자기술을 우리시대 어떻게 쓸 것인가’하는 논의였다.

문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우리는 자유라는 단어만으로 열정에 휩싸이고, 어머니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사무친다. 문자 자체가 사유와 정서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오랜 인류 역사에서 지배계급이 문자를 독점적으로 관리한 것 역시 문자가 품은 힘이 혁명으로 터져 나올까 두려워서였다. 문자 주변에 늘 긴장감이 도는 까닭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 문자는 사유와 정서의 담지체였다.

요즘 이 문자가 방향 없이 튀어 오른다. 국정농단의 조력자였던 어버이연합, 엄마부대는 이 시대 문자가 어떻게 사유를 잃고 고립되는지 잘 보여준다. 정부의 지시를 받아 재벌이 입금해준 돈 중 몇 푼을 받고 양심을 파는 이들과 어버이가 어떻게 어울릴까. 자식을 잃고 애통해하는 이들을 찾아 패악을 부리는 이들과 엄마가 어떻게 조화로울까. 사회에 생채기를 내며 등장한 문자 ‘어버이’나 ‘엄마’에는 사유와 정서는커녕 염치조차 없어 보인다. 우리시대 고립된 문자의 진상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안희정 지사의 ‘선한 의지’도 마찬가지다. 철학과를 나온 것을 보면, 칸트 철학에서 빼왔을 법한 이 단어에서 사유는 철저하게 공란이다. 안 지사의 말은 ‘법은 목욕탕’이라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의 언어다. 우리는 그런 대통령 때문에 지난 겨울 광장에서 얼마나 서성댔던가.

우리 국민 10명 중 9명은 객관적 근거 없이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인지적 오류’를 보이는 것으로 조사됐다(한국일보 2월18일자). 사실 이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허버트 사이먼은 인간은 최대치의 합리성을 추구하기보다 만족감을 따른다고 이미 오래 전 주장했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을 과신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고, 타인 의견에도 객관적이지 않다. 태블릿 조작과 진실이 엉겨 붙고, 탄핵과 빨갱이가 엉겨 붙는다. 문자는 도착증 환자처럼 이리저리 붙어 다니며 사람들을 혼란스런 확신에 빠뜨린다. 가짜 뉴스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락까지 바꾸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가짜 뉴스 중 하나를 만든 사람은 미성년자였고, 그는 미국선거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냐고 되물었다. 이 자체를 문자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혁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각국은 이런 문제, 즉 개인 인식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생각을 단단하게 할 사유의 힘을 길러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서 사유는 물론 정서도 공란이다. 교육부 자체가 국민을 개돼지로 파악하는 인지적 오류에 빠져 국정교과서를 선전하고 있는 판국이다. 청부업자가 된 교육 엘리트, 인터넷시대 문자 테크놀로지를 흔들고 있다.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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