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척박한 국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일군 거목 지다

알림

척박한 국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일군 거목 지다

입력
2015.08.02 19:36
0 0

자본론 첫 완역, 학계 필독서로

비주류 자처하며 평생 왕성한 연구

새로운 사회 희구한 행동하는 양심

동유럽 붕괴 이후에도 확고한 신념

제자들엔 자상하고 소탈한 스승

지난달 31일 별세한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영미식 주류경제학이 석권한 국내 경제학계에 보기 드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그가 근간을 구축한 비주류 경제학 덕분에 한국의 경제학은 비로소 좌우의 두 날개로 날 수 있었다. 2007년 11월 서울대 교수 정년 퇴임을 앞두고 본보와 인터뷰를 하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달 31일 별세한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영미식 주류경제학이 석권한 국내 경제학계에 보기 드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였다. 그가 근간을 구축한 비주류 경제학 덕분에 한국의 경제학은 비로소 좌우의 두 날개로 날 수 있었다. 2007년 11월 서울대 교수 정년 퇴임을 앞두고 본보와 인터뷰를 하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거목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1일 오전 1시30분 (미국 현지시간 지난달 31일 오후 10시30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김 교수는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국내 최초 완역했으며,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가르친 처음이자 마지막 교수였다.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환호가 학계마저 잠식한 한국사회에서 최후까지 비주류를 자처하며 왕성하게 연구했고, 누구보다 젊고 날 선 목소리로 새로운 사회를 희구한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2일 한국사회경제학회에 따르면, 김 교수는 24일 아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 유타주로 향했다가 일주일 뒤 현지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장례는 3일 오후 3시(현지시간) 미국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학회와 성공회대 측은 장례를 마친 뒤 시신을 한국으로 옮겨 학교장 또는 사회장을 치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1942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ㆍ석사 학위를 받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당초 은행 취업을 목표로 대구상업학교를 선택했지만, 장학금 제도를 알고 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외환은행에서 일했고, 런던지점 근무를 계기로 진로를 변경, 런던대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82년 10월 귀국해 한신대 교수로 임용됐지만 학내 민주화투쟁을 주도하다가 해임됐다.

고 김수행(맨 오른쪽) 교수가 영국 유학시절 런던의 카를 마르크스 무덤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고 김수행(맨 오른쪽) 교수가 영국 유학시절 런던의 카를 마르크스 무덤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금서(禁書) ‘자본론’ 번역을 시작한 것은 떠돌이 강사가 된 이 시기다. 첫 번역을 시도한 국내 학자는 월북한 전석담 박사였고, 독일어 원전 일부를 번역해 익명으로 펴낸 것은 87년 강신준 동아대 교수였지만, 출판사와 필자가 즉각 수배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김 교수는 89년 2월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자마자 펴낸 1권을 시작으로 90년 3월 3권까지 잇달아 영어판을 완역해 선보였다. 당시 강 교수 책을 수사하던 검사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기소를 포기한 데다,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는 고인의 태도에 당황한 당국이 조치를 포기하면서 불온도서 ‘자본론’은 순식간에 학계의 필독서로 자리잡았다.

서울대 임용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동료 교수들의 반대 속에 대학원생들은 “정치경제학 전공자를 영입하라”며 수업거부ㆍ농성을 불사했고, 결국 학교 측이 손을 들었다. 그렇게 둥지를 튼 고인은 “자본주의의 핵심동력은 자본가들의 이윤추구 욕심이며, 주류경제학만으로는 결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과 갈등, 불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척박한 국내 정치경제학계를 개척해갔다.

지인들은 고인을 합리적이지만 진취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자상하고 소탈한 스승으로 기억한다. 제자인 정성진 경상대 교수(한국사회경제학회장)는 “소련, 동유럽 붕괴 후 많은 제자들이 생각을 바꾸는 가운데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타당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킨 모습을 존경한다”며 “정년 후에도 젊은 연구자들을 부끄럽게 할 만큼 정력적인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갑작스런 소식에 황망할 뿐”이라며 애석해했다.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수백 명이 듣는 강의의 시험에서 2시간 동안 아는 것을 모두 쓰게 한 뒤 한 줄 한 줄 빨간펜으로 첨삭을 해 돌려주실 정도로 열정적인 분”이었다며 “구속됐다 37세에 복학해 듣는 수업에서 시험지를 돌려주며 ‘저 친구가 옥고를 치르고 돌아와 열심히 공부하는 여러분 선배로 이번 학기 최고점’이라고 격려해 울컥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2005년 한국일보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시리즈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가난에 관심이 많았다. 매우 똑똑한 친구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저 친구들이 잘 되어야 우리 사회도 잘 될 텐데 하면서 안타까워했다."고 적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은 아직껏 계속되는 세계경제의 불황과 그것을 타개하려는 자본가계급과 선진국 정부의 전략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그 타당성을 꾸준히 역설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2005년 한국일보의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시리즈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어릴 적부터 가난에 관심이 많았다. 매우 똑똑한 친구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저 친구들이 잘 되어야 우리 사회도 잘 될 텐데 하면서 안타까워했다."고 적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은 아직껏 계속되는 세계경제의 불황과 그것을 타개하려는 자본가계급과 선진국 정부의 전략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그 타당성을 꾸준히 역설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인이 19년 만에 정년 퇴임한 2008년 2월 전후로는 서울대가 후임자를 경제학 일반 전공자로 뽑기로 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고인이 “자본주의가 우리를 ‘천년왕국’으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오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효용가치가 사라졌다는 단정은 잘못”, “학교가 케인즈주의자조차 꺼린다” 등의 우려를 표명했지만 불안은 현실이 됐다. 고인의 사회참여 행보에 동행해온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참다운 교육자이자 독보적 연구자인데, 고인을 이을 만한 탁월한 연구자가 없는 가운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안타깝다”며 “서울대는 그와 닮은 최소한의 비판적 전공자 한 사람도 교수로 확보하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고인은 퇴임 후에도 왕성한 활동으로 비주류 경제학의 근간을 쌓았다. 저서로는 ‘알기 쉬운 정치경제학’, ‘자본론의 현대적 해석’,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세계대공황’, ‘자본론 공부’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 등이 있으며,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주류 경제학의 바이블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도 번역했다.

젊은 시절부터 테니스 등 운동을 즐겨온 고인은 최근까지도 젊은 제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고, 전원주택에 머물며 스스로 땔감으로 쓸 장작을 패는 등 건강한 모습을 보여온 터라, 고인을 잃은 학계는 더욱 황망한 표정이다. 고인이 창립해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한국사회경제학회는 이날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으로 험난한 자리를 지켜온 고인의 별세에 안타까운 심정”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