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떨어지면 강제 퇴거 등 52곳 중 39곳 차별적 규정 운영
14곳은 취침이 5시간 미만… 급식 차별에 ‘금수저 논란’까지
#서울 강동구에 사는 이모(16)양은 기숙사 규정을 탓해야 할지,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야 할지 고민이다. 이 양이 다니는 B고교 기숙사는 전열기기 사용을 금지시켜 여학생들이 헤어 드라이기마저 쓸 수 없다. 이 양은 “물기가 뚝뚝 흐르는 미역 같은 머리로 등교하는 바람에 한겨울에 감기 걸리는 학생들이 태반”이라고 토로했다. 이 양은 그나마 이런 고민마저도 내년에는 아예 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B고가 내년부터는 등교거리가 아닌 성적순으로 기숙사 거주 학생을 선발하겠다고 갑자기 통보했기 때문이다.
#서울 관악구 A고교에서 2년째 기숙사 생활 중인 윤모(17)양은 마음 편히 깊은 잠에 들어본 적이 없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소등 시간인 밤 12시 30분까지 공부하다 잠들지만 매일 오전 6시에 기상해야 되기 때문이다. 윤양은 “학교에서 기숙사까지 걸어서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데도 기상 시간을 군대처럼 이른 시간으로 규정해 놓은 게 이해되지 않는다”며 “늦잠 벌점이 쌓이면 강제퇴실 당할까 두려워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숙사를 운영하는 서울의 중ㆍ고교 가운데 상당수가 학생을 성적에 따라 차별하거나 군대 수준의 엄격한 규율을 적용해 학생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8일 본보가 입수한 서울시교육청의 ‘기숙사 운영학교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 에 따르면 기숙사를 운영하는 서울 시내 52개 중ㆍ고교(전체 69개교 중 조사 불응 학교 제외) 가운데 75%(39개교)가 학생 차별적인 규정을 운영하고 있다. 등ㆍ하교 거리와 무관하게 성적순으로 입소자를 선발하거나, 국제학교 등 특정학교 출신자에게 기숙사를 우선 배정하는 규정이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로 적발됐다.
한 교육전문가는 “중부권 S고에선 성적순으로 기숙사 학생을 선발하고는, 점심시간에 일반학생과 다른 별도의 급식까지 제공해 논란이 됐다”면서 “이런 차별이 자연스럽게 교육현장의 금수저 은수저 논란을 일으킨다”고 아쉬워했다. 학생들 사이엔 “공부 잘하면 ‘일반미’, 못하면 ‘정부미’”란 말이 돌고 “억울하면 공부 잘하라”는 자조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군대를 방불케 하는 기숙사 규정으로 학생 인권을 무시하는 학교들도 다수 발견됐다. 기숙사 거주 중 학업 성적이 떨어진 학생, 학교에서 운영하는 방과후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을 강제 퇴거시키는 ‘강제 퇴실제’를 운영하는 학교는 39개교(75%)에 달했다. 또 이른 시각 기상을 의무화 해 학생들의 평균 취침 시간이 군대보다도 못한 5시간 미만인 학교도 14개교(27%)로 파악됐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일부 운동부 기숙사는 엄격한 규정을 정해놓고 어길 경우 ‘단체 기합’을 주는 경우가 아직 있었다”고 전했다. 한 교육전문가는 “입시만을 목표로 경직된 규율을 강요하는 교육현장의 모습이 군대와 흡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상식 밖의 규정이 운영되고 있는데도 학생들에게는 부당함을 호소할 방법마저 마땅치 않은 현실이다. 이번 실태조사에서 기숙사에 거주하는 서울 시내 중ㆍ고교 학생 2,172명 가운데 기숙사 인권침해 문제를 상담ㆍ해결하기 위한 학내 기구가 없다고 응답한 학생은 21%, 상담기관에 대해 안내 받지 못했다고 답한 학생도 27%나 됐다.
윤명화 시교육청 학생인권옹호관은 “현장에서 나온 추가 의견과 기존의 실태조사 결과 등을 종합해 학교 기숙사 운영 규정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늦어도 내년 초 각 학교에 내려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교육청은 이 같은 기숙사 인권 침해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10월부터 서울 시내 기숙사 운영 학교 69개교에 인권 강사를 파견해 기숙사 인권 교육을 실시했다.
김민정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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