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글ㆍ야마무라 코지 그림ㆍ엄혜숙 옮김
그림책공작소ㆍ40쪽ㆍ1만2,000원
“타인의 생각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건 윤리적인 축복입니다. 다른 사람을 상상함으로써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이해하는 건 문학만이 가진 본연의 미덕입니다.”
얼마 전 박경리문학상 수상 차 방문했던 아모스 오즈 선생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과 기념 강연(본보 10월 22일자 16면 참조)의 핵심은 이른바 ‘보편적 진리에 이르는 삶’에 대한, 그리고 세계 4대 성인들이나 덕망 높은 시골 어르신들이 두루 언급하는 이른바 ‘인간 삶의 기본 도리’에 대한 강조로 다가왔다.
‘첼로 켜는 고슈’ ‘은하철도 999’의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시에 애니메이션 감독 야마무라 코지 특유의 섬세하고도 역동적인 그림이 묘하게 사무치는 그림책 ‘비에도 지지 않고’ 또한 그렇다.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으로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늘 조용히 웃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자기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로 이어지는 이 자경(自警) 시는 시인 스스로 경계하는 내용으로써 전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답한다.
야마무라 코지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군중 속에 묻듯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멀찌감치 또는 옆모습 뒷모습과 흔적과 그림자로 주인공을 그렸다. 그렇게 우주의 한 점인 듯 미약한 존재이지만 그의 조촐하고도 경건한 일상과 사고는 온 세상을 구원하는 데 바쳐져 독자의 마음에 창대한 나팔 소리를 울린다. 이 주인공은 당연히 시인 미야자와 겐지일까?
최근에 밝혀진 연구에 의하면, 시인이 숭배하고 흠모했던 사이토 소지로라는 크리스천으로 미야자와 겐지네 마을 가까이에 살면서 지극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한 전설적 인물이라고 한다. 아모스 오즈 식으로 말하자면 미야자와 겐지의 문학은 사이토 소지로에 대한 상상과 이해로부터 구현된 축복인 것이다.
아, 시를 좀더 읽어드리지 않을 수 없다. ‘…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볏단 지어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별거 아니니까 말하고/ 가뭄 들면 눈물 흘리고/ 냉해 든 여름이면 허둥대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상희ㆍ시인(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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