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회사 일하다 파리 정착하고, 교사 그만두고 협동조합 취직도
"아이·아파트 대출 없어서 가능, 벌이 적지만 이젠 부속품 아냐"
사표를 쓰고, 내미는 것은 주로 상상력의 몫이다. 한 자 한 자 정성껏 적었든 분에 못 이겨 써 내렸든, 부치지 못한 사직서는 가슴팍에 고이 모신다.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는 대사(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가 만고의 진리처럼 회자되는 불경기에서는 더하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 능사는 아니더라’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특히 회사 바깥에 보다 분명한 목표를 세웠거나, 내 인내가 더 이상 백해무익하다고 판단될 때 퇴직할 용기가 부쩍 샘솟는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채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회사를 떠난 신입사원은 꾸준히 늘어 4명 중 1명에 달했다. 더 가슴 뛰는 일을 찾아, 근로 조건이나 풍토가 맞지 않아서, 아직 젊거나 딸린 식구가 없어서, 배우고 싶은 게 많아서 등 다양한 이유로 회사를 떠난 2030세대들이 이직, 창업, 제2의 진로 모색 등으로 분주하다.
“그만둬야만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이들이 퇴사를 결심한 것은 로또가 당첨돼서도, 물려 받을 건물이나 논 마지기가 있어서도, 남다른 용기를 뽐내기 위해서도, 실업시대에 ‘가진 자의 여유’를 누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회사에 남아 행복할 수 있다면, 견뎌낼 수 만 있다면 그 또한 축복”이라는 이들은 자주 지치고 버거웠지만, 침착한 준비로 행복 충만한 자신의 길을 일구고 있다. 3~7년 차 전(前) 직장인들에게 물었다. 퇴사, 어땠어요?
가슴 뛰는 일을 찾아서
와인수입사에서 영업을 맡아 하던 정희태(31)씨는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올해 초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조리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국립 와인농업학교(CFPPA) 소믈리에 과정을 수료한 그에게 입사 초 회사는 자신의 적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적소로 생각됐다. 열정적으로 도소매상의 계약을 중재해왔지만 어느 순간 허무와 싫증이 밀려왔다.
“와인의 향, 맛, 목적 등 그 본질을 고민할 기회는 많지 않았죠. 얼만큼 싸게 물건을 줄 수 있을지, 사은품은 무엇인지 등에만 집중하는 현실 속에서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삶이 이거였던가 싶었어요.”
안정된 삶을 떨쳐내는 데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지만 고민 끝에 프랑스로 향했고, 유학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한 차례 경험해 본적 있는 가이드이자 문화해설자로서, 낯설지만 가슴 뛰는 인생을 개척하고 있다. “다양한 이들에게 역사와 종교, 건축 등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며 많은 것을 배우는 일이 참 즐거워요. 언젠가 제가 공부했던 요리와 와인의 매력을 접목한 저만의 투어도 개발하고 싶어요. 상상만해도 짜릿하지 않나요?”
내 자신에 충실한 삶
선망의 직업으로 꼽히는 교사의 길을 걷던 박형도(30ㆍ가명)씨는 최근 한 협동조합으로 이직해 기획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급여는 적잖이 줄었지만, 학교에서는 1년 단위로 반복되는 교무 행정과 잡무에 지치고 시든 선배 교사들의 모습을 보며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직업도 제 성향이나 예상과 맞지 않는다면 과감히 나와 다른 길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면서도 “다만 이런 시도는 아직 아이와 아파트 대출 없었기 때문에 감히 가능했던 것일 뿐”이라고 회고했다. 퇴사에 관한 한 2030세대가 여타 세대에 비해 비교적 가벼운 몸과 마음 상태일 확률이 크긴 하나, 이는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인 만큼 적잖은 동료들이 현실적인 이유로 감수와 인내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또 “야근에 치이며 부속품처럼 쓰이기보다는 저녁이 있는 삶이나, 자신에게만 충실한 삶을 추구하겠다는 지인들이 많은데, 이 역시 아직 30대라 가질 수 있는 생각인 것 같다”며 “내가 어느 때 행복한가, 즉 시간을 얻고 신념을 추구할 수만 있다면 적은 월급으로도 계속 만족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미뤄뒀던 꿈을 위해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뒀던 꿈을 뒤늦게 실현하기 위해 퇴사를 선택한 이들도 있다. 3년간 재직한 무역회사를 나온 홍재우(29ㆍ가명)씨가 그런 경우다. 중국과 한국으로 오가며 입사 후 줄곧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온 그는 늘 소설 집필을 꿈꿔왔다. 하지만 넉넉치 않은 집안형편을 모른 채하고, 당장 성공할 수 있는 보장이 없는 작가의 길을 고집할 수는 없어 입사와 동시에 이 꿈을 미뤄뒀다.
하지만 늘 시간에 쫓기고 얽매여 살 수 밖에 없는 업무 특성상 하늘 한번, 거울 한번 올려다 볼 수 없는 일상이 반복됐고 이러다간 영영 돌아올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는 지난해 퇴사 후 친형과 프로그래밍을 주력으로 하는 신생벤처를 꾸려 일하고 있다. 비교적 시간활용이 자유로운 벤처회사 운영과 작가수업을 병행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길을 간다고 반드시 더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남의 시선이 아닌 내 시선으로 차분히 살아가는데 만족한다”고 했다.
퇴사 전후의 다양한 고민을 다룬 ‘사표 사용 설명서’의 저자 황진규(36)씨 역시 대기업 퇴사 후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경우다. 그는 “강연과 상담에서 사람들이 항상 따지듯 ‘그만둘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한다”며 “운 좋게 현재 직장에서 즐겁거나 버틸만하다거나 회사와 일, 자신을 분리해 살아낼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조차 아닌 경우 자신이 자기 삶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뛰쳐나오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자신이 단지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을 자기착취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는 취지다. 회사는 꼭 임원으로 우뚝 서거나,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진 뒤에만 실려 나와야 하는 곳인가. 퇴사는 천재적 벤처의 영웅신화를 만들 각오가 있는 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인가.
정씨는 반문했다. “저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해 섣부르게 말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동생, 형, 친구로서 묻고 싶습니다. 지금 혹시 인생에 감동받고 계신가요. 진심을 담아 내 일을 사랑한다고 말씀해 보셨나요.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하시며 사십시오. 남의 시선에 사로잡힌 내가 아닌 온전한 나를 위해 앞으로 나가십시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준호인턴기자 (동국대 불교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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