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쓴 책을 표지만 바꿔 마치 자신이 쓴 것처럼 ‘표지갈이’를 한 대학교수 200여명이 검찰에 적발됐다. 대학가에서 그 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표지갈이의 실체가 밝혀짐에 따라 교수들의 무더기 교단 퇴출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도 점쳐진다.
의정부지검 형사5부(부장 권순정)는 표지갈이 수법으로 책을 내거나 이를 눈감아준 혐의(저작권법위반 등)로 전국 50여개 대학교수 200여명을 입건했다고 24일 밝혔다. 또 표지갈이 책을 새 책으로 둔갑시켜 준 3개 출판사 임직원 4명도 같은 혐의로 입건했다.
검찰에 따르면 해당 교수들은 전공서적 표지에 적힌 다른 저자명을 자기 이름으로 바꾸거나 책 제목에 한두 글자를 넣고 빼는 수법으로 새 책을 출간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반면 실제로 책을 쓴 교수들은 표지갈이 책들이 제작ㆍ유통되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해관계 때문에 모른 척 넘겼다.
해당 교수들은 서울과 수도권, 충청ㆍ제주에 이르는 전국 50여개 대학 이공계 전공 교수들로 국공립대와 유명사립대 교수는 물론 여러 학회장 등도 포함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전공서적 1권을 표지갈이 수법으로 출간했으나 일부는 3∼4권까지 표지갈이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관계자는 “압수한 책들은 물리 생물 화학 등 이과계열 기초과학 분야 대학 전공서적”이라며 “소량으로 출간돼 해당 교수가 강의하는 대학 근처 서점에서만 판매됐다”고 전했다.
검찰은 교수들이 속한 대학과 서울, 경기 파주지역 출판사 등을 지난 8월 압수수색해 이메일과 연구실적 등 범행증거를 확보했다. 검찰 조사결과 이들은 소속 대학의 재임용 평가를 앞두고 연구실적을 부풀리려고 표지갈이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제자들에게 표지갈이 책을 팔아 인세를 챙기려 한 ‘저질 교수’도 있었다고 전했다.
표지갈이는 실제 책을 쓴 원 저자와 허위 저자, 출판사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탓에 1980년대부터 성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표지갈이는 허위 저자에게는 연구실적을 올리는데 필요했고, 출판사에게도 비인기 전공 서적 재고를 처리하는 방법으로 활용됐다. 또 원 저자는 이공계 서적을 꺼리는 출판업계 특성상 향후 책을 낼 출판사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표지갈이에 동의했다.
교육부와 대학들은 점차 표절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는 사회분위기에 맞춰 최근 논문 표절 교수와 벌금 300만원 이상을 선고 받은 교수는 재임용하지 않는 추세여서 이들 교수는 퇴출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김영종 의정부지검 차장검사는 “논문 일부를 베끼는 표절보다 원저자의 연구성과를 통째로 가로채는 표지갈이가 더 큰 문제”라며 “다음 달 중순까지 전원 기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표지갈이가 대학가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이태무기자 abcdef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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