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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깃털처럼 가벼운 심장

입력
2017.01.0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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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의 끄트머리에 팔순 넘으신 엄마를 모시고 제주도엘 갔다.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사려니 숲에 들었다. 눈에 보이는 오솔길들이 궁금해 앞장 서 걷는데 엄마는 금세 다리가 아프다고 하신다. 겨울 바다가 반가워 숙소 앞 해변에 나가자고 했다. 호텔 문을 열자마자 엄마가 뒤돌아 서신다. 세찬 바람이 무섭고 춥다고 로비에 앉아 기다리시겠단다. 내가 무럭무럭 늙고 있는 동안 우리 엄마 저렇게 힘이 빠지셨구나, 후회가 밀려 들었다.

함께 간 여동생이 물었다. “엄마는 내년에 뭐 하고 싶어?” 엄마는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뭐라 할 지 모르겠지만, 내년에는 죽고 싶어…”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였다. 최소한 증손자 볼 때까지는 살아야 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냈지만, ‘해 볼 것 다 해 봤고, 이제 더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는 엄마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나도 가끔 너무 오래 살까 봐 걱정이 되곤 하니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는 말 대신,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우리 엄마. 나는 엄마가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영원히 살 것처럼 엄마를 우선순위에서 미뤄 둔다. 짧은 여행 중에도 짜증을 내고 핀잔을 주고 다음에는 둘이서만 오자고 동생과 속닥거린다.

2006년 전파를 탔던 동양생명의 TV-CM은 말기암에 걸린 여성과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결혼한 남자가 주인공이었다. 그들이 결혼반지를 사고 삭발을 하고 웨딩 사진을 찍고 환자복을 입은 채 뽀뽀하는 스냅사진이 모여 한 편의 광고가 되었다. 그 사진들 중에는 액자에 검은 리본을 두른 그녀의 영정사진도 있었다. 광고가 나갈 때 이미 그녀는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이다.

(동양생명 TV-CM 카피)

자막)어느 날 찾아 온 말기암 판정,

그녀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녀가 삭발하기 전 날 그도 처음으로 머리를 밀고,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지만

결혼반지를 사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갔습니다

웨딩사진을 찍기 전에 영정사진을 먼저 찍었습니다

사랑에는 시한부가 없음을 알려준 당신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사랑을 알고 갑니다

NA)당신이 천사입니다

자막)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사랑은 MBC휴먼다큐에 방송된 실제 이야기입니다.

고인이 되신 서영란씨의 삼가 명복을 기원합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죽으면 지하세계에 가서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다. 죽은 자가 저울 한 쪽에 자신의 과거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심장을 올려 놓으면 진실의 여신이 정의를 상징하는 깃털 하나를 반대편에 올려 놓고 무게를 잰다. 죄가 많으면 저울이 아래로 기울어저울 아래 있는 아무트라는 괴물에게 심장을 잡아 먹힌다. 심장을 잃은 사람은 영혼이 소멸해 영생의 기회를 잃어버린다. 죄가 없는 사람의 심장은 깃털과 균형을 이루고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 오시리스에게서 영생을 보장 받는다는 것이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결혼하는 지극한 사랑과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받기만 하는 이기적인 나… 아마 나의 심장은 저울 아래로 툭 떨어져버릴 것이다. 새해가 되었다. 한 살 더 먹은 만큼 죽음에 한 살 더 가까워졌다. 새해에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고 있는 일들을 해야겠다. 죽을 때도 가져갈 수 있는 것에 시간을 쏟아야겠다. 눈물, 웃음, 위로, 포옹, 촛불, 편지 같은 것들. 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심장을 가볍게 할 것에게 마음을 줘야지. 주변의 마음 다친 사람들을 돌아보고, 다시 엄마 손을 잡고 나들이를 할 것이다.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샘내지 않고 축하하고 옛 친구에게 엽서를 띄우고 낯선 도시로 가는 기차표를 끊을 것이다.

깃털처럼 가벼운 심장! 어떤 명품 매장에서도 살 수 없는 그것을 새해 내 버킷리스트 꼭대기에 올려둔다.

http://www.adic.co.kr/gate/video/show.hjsp?id=W1361570&type=T

(동양생명 TV-CM 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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