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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

입력
2018.08.0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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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 최인훈이 지난 달 세상을 떠났다. 1960년에 발표됐으니 나와 갑장(甲長)이기도 한 ‘광장’을 비롯, 최신작 ‘바다의 편지’까지 그의 작품을 두루 읽고 모두 좋아했다. 그의 작품을 생각하면 뜬금없이 맨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바다는 그리워서 흔들리는 새파란 가슴’이다. 소설 ‘구운몽’에 나오는 자작시 ‘해전(海戰)’의 한 구절인데 이 시는 인류 문명에 대한 사색으로 가득 찬 그의 역작 ‘바다의 편지’에도 다시 실렸다. 무릇 모든 생명은 바다에서 탄생했지만 한번 벗어나면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바다는 그리워서 흔들리는 새파란 가슴일까? 분단체제의 상징적 지식인인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의 체제에 절망하고 제3국행을 택하지만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진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는 소설 속 구절대로 따랐다. ‘광장’은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체제를 모두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정신의 출현을 알렸다. 작가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지 문학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겸손해 했지만 태어나자마자 이데올로기라는 틀에 갇혀 있었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이를테면 와해성 충격을 주었다.

산업현장에서의 진보와 혁신의 의미는 더 극적이다.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ies)은 기존의 기술을 와해하고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기술을 가리킨다. 피터 틸은 그의 책 ‘Zero to One’에서 더 좋은 선풍기를 만드는 것이 수평적 진보라면 에어컨을 만드는 것은 수직적 진보라고 이 둘을 확실히 차별했다. 기업이 와해성 변화를 맞았을 때 잘 나가는 사업 모델을 점진적으로 축소하는 것보다 오히려 스스로를 와해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대응해야 혁신이 일어난다. 전자 담배는 30년 전부터 있었지만 필립 모리스가 잘 나가는 자사 사업에 동족 식인(cannibalization)의 높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30억 달러를 투자해 궐련형 전자담배 아이코스를 개발하면서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전통적인 담배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와해성 혁신이 산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과거의 행동을 더욱 강화하며 대응하는 이른바 활동적 타성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활동적 타성은 과거 성공을 누린 자에게만 나타난다니 영웅은 결국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준 경험에 발목이 잡힌다. 그래서일까, 국내 유수 그룹 중 하나가 세운 인큐베이팅 전문 투자회사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팀을 정기적으로 선정해 자본금 지원, 사무 공간 임대, 그룹사 연계 등의 여러 혜택을 제공하면서도 ‘우리 그룹을 망하게 할 사업 아이템을 꼭 발굴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최인훈의 자작시 ‘해전’은 원인도 알지 못하는 전쟁에 동원돼 잠수함에서 수장 당한 젊은 수병들의 영혼이 찻집 어항 속의 금붕어로 귀환해 그 죽음의 안타까움을 전한다는 내용이다. 수병은 결국 백골이 되지만 자신을 수장한 바다가 임무를 띤 배들이 숨어 다니는 바다가 아니고 햇빛 아래에서 흰 돛을 달고 달리는 아름다운 돛배들의 놀이마당이 되리라 소망한다. 또 우리 모두의 나는 유한하지만 이 우주는 무한하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소멸과 해체를 받아들인다. 최인훈이 광장으로 떠난 바로 그 날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또 하나의 안타까운 부음을 듣고, 사람들은 순결한 영혼을 송두리째 삼키며 전진하는 역사를 사뭇 두려워한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모든 생명은 자기를 와해하고 넘어설 때 비로소 새 길이 열리는 것인가? 두 고단하고 외로웠던 문명의 탐색자는 전한다. 풍랑 치는 바다 위 고독한 항해자여! 길은 없다. 길은 걸으면서 만들어진다.

구자갑 롯데오토리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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