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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뺑뺑이 도는 아이, 놀이시간 보장 받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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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뺑뺑이 도는 아이, 놀이시간 보장 받는 아이

입력
2016.05.0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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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대전 서구 갈마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달팽이 놀이를 하고 있다. 갈마초는 하루에 50분씩 놀이시간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지난달 29일 대전 서구 갈마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달팽이 놀이를 하고 있다. 갈마초는 하루에 50분씩 놀이시간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그만 놀고 공부해.”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흔히 쓰는 이 말에는 놀이에 대한 경시와 공부에 대한 편애가 오롯이 담겨있다. 그래서 ‘아동의 놀 권리’라는 말은 한국에선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여가ㆍ문화ㆍ오락생활 등 놀이는 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보호받아야 할 기본권이다. 어린이날,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선물은 놀이다. 두 어린이의 하루를 따라가며 놀이와 학습 기회의 공평한 제공 필요성을 생각해본다.

방과후 학원만 3개… “하루가 너무 힘들어요”

“엄마 나 오늘만 영어학원 안 가면 안돼?” 지난달 29일 아침, 정호진(가명·8)군이 출근 준비를 하던 엄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는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는 어떤 일을 하든 영어는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해.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알았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학교로 향하는 호진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서울 강남의 한 초등학교 2학년생 호진이에게 금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이다. 일주일 동안 다니는 학원은 영어, 피아노, 미술, 축구 등 6곳. 그 중 오늘은 3군데를 가야 한다.

오후 1시30분 학교가 끝나면 호진이의 ‘진짜 일과’가 이제부터 시작된다. 집에 도착해 간식을 먹고 태권도 학원 차량에 올라타면 오후 2시30분. 한 시간 뒤 집에 오면 영어학원 갈 준비를 해야 한다. 바닥에 드러누운 호진이가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린다. “할머니 나 영어학원 가기 싫어!” 손자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할머니는 ‘최후의 방법’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진아 그러지 말고 학원 가야지.”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영어학원을 마치고 오후 6시45분쯤 영어학원 버스에서 내리면 기다리던 수영학원 버스가 호진이를 태운다. 수영까지 마치고 집에 도착하면 오후 8시. 늦은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영어학원 교재를 폈다. 오늘의 숙제는 영어책 2권씩 읽기와 영어 지문 읽고 문제 풀기다. 숙제는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그나마 지금은 나은 편이다. 지난해에는 여기에 창의수학·과학 학원도 다녀야 했다. 경시대회나 영재 테스트 얘기가 솔솔 나오던 어느 날 학원 버스에서 내려 엄마를 본 순간 호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다쳐도 울지 않을 만큼 마음이 단단하던 아들의 울음에 엄마는 두 학원을 그만두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영어는 포기할 수 없었다.

물론 호진이 엄마 박모(38)씨도 놀이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그는 “아이가 하루 종일 공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에게 자녀 방과 후부터 퇴근까지는 돌봄의 공백 시간이다. 이를 메우는 손 쉬운 방법이 속칭 ‘학원 뺑뺑이’다. 학원을 가지 않으면 또래 친구를 만날 수도 없다. 이날 오후 10시30분 잠자리에 들려던 호진이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애들은 원래 놀아야 하는 거잖아. 근데 학교 가고 학원 갔다 오면 잘 시간인데 언제 놀아?” 엄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매일 50분씩 놀았더니… 성적도 자신감도 쑥쑥

대전 서구 갈마초 6학년 최민호(12)군은 매일 매일 학교생활이 즐겁다. 지난달 29일 오전 10시30분 2교시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리자 민호는 재빨리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민호가 달려간 곳은 운동장 한 켠에 그려진 달팽이 놀이 원형 트랙. 중간에서 1학년 학생과 마주섰다. “가위 바위 보!” 민호가 이기자 같은 팀 친구들이 환성을 지르며 외쳤다. “민호야 달려 달려.” 아이들의 놀이는 20분 뒤 수업 시작 종소리가 들리면서 중단됐다. 민호는 아쉬운 듯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비겼으니까 우리 내일 또 하는 거다! 약속!”

이 학교에선 2교시 후 20분, 점심시간 후 30분을 공식 ‘놀이시간’으로 지정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 시간과 권리를 보장해주고 놀이를 통해 인성을 증진시킨다는 취지에서 2013년부터 대전시교육청이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이 시간 동안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과 복도 등 곳곳에 모여 놀이를 한다. 사방치기, 고누 등 전통놀이와 공기놀이, 앉은뱅이 피구 등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장소도 마련됐다.

놀이시간은 민호가 하루 중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다. 친구와 함께 놀이를 하다 보면 시간이 짧다. 점심 식사시간 대화 주제도 단연 놀이 활동이었다. “밥 다 먹고 호박 고누 할래?” 민호의 제안에 친구들이 ‘좋다’고 입을 모았다. 식사를 끝낸 아이들은 복도에 그려진 놀이판으로 달려가 직접 말이 돼 고누 놀이를 시작했다.

민호는 "이전에는 쉬는 시간이 10분 밖에 안되고 놀 거리도 딱히 없었는데 3학년부터 놀이활동이 생기면서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나 할 수 있는 게 많아져 좋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친구들과 잘 협력해 인기가 많은 민호는 올해 학생회장에도 당선됐다.

민호가 받는 사교육은 일주일에 3회 2시간씩 다니는 영어학원이 전부. 하지만 전교 순위권에 들 정도로 성적은 우수한 편이다. 민호의 어머니 전숙이씨는 “학교에서 놀이활동을 한 이후로 아이가 스트레스를 덜 받고 집에 와서도 누나들과 오늘 한 놀이 이야기를 한다”며 “놀이시간에 충분히 노니 오히려 수업시간에 집중하고 집에 와서도 자발적으로 책상에 앉아 복습을 해 아이를 더 믿게 됐다”고 말했다.

민호는 이날 오후 3시 수업이 끝난 뒤에도 친구들과 교실 뒤편에서 산가지 놀이를 하다 오후 5시가 다 돼서야 학원으로 향했다. ‘컴퓨터 게임도 좋아하냐’는 질문에 민호가 웃으며 답했다. “음… 그렇긴 한데 그래도 친구들이랑 학교에서 노는 게 더 재밌어요.”

대전ㆍ서울=허경주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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