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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못받았다니...이동진이 뽑은 작품상

입력
2017.03.1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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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상에는 외의성이 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갸우뚱했던 결과가 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가치를 발견한 탁견이었음이 증명되기도 하고, 그와 정반대로 흥미로워 보였던 시상 내역이 당대의 편견과 군중심리의 산물이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노벨문학상만 해도 그런 사례들이 즐비하다. 윈스턴 처칠이나 버트런드 러셀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의아스러운 사실 반대편에는 레프 톨스토이와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그 상을 받지 못했다는 당혹스러운 사실이 있다(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아카데미상)은 더욱 그렇다. 톰 후퍼와 미셸 아자나비시우스와 멜 깁슨과 로버트 벤튼은 받았지만, 앨프레드 히치콕이나 스탠리 큐브릭은 받은 적이 없는 아카데미상 감독상은 대체 어떤 상이란 말인가.

그러니 떠들썩한 수상 소식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것일 테다. 지난 10년간, 아카데미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작품상 리스트 중 내가 만일 결과를 바꿀 수 있다면 난 이렇게 할 것이다(당신이라면?).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며 삶의 의미를 되짚는다.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며 삶의 의미를 되짚는다.

‘보이후드’

2015년, '버드맨' 대신에 '보이후드’. 어느덧 대학에 들어가게 된 아들은 집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싼다. 평소 과묵했던 아이지만 이제 유년의 끝에서 새로 펼쳐질 나날을 상상하느라 짐 챙기는 와중에도 흥분해 떠들어댄다. 이것저것 아들을 거들다가 결국 의자에 주저 앉은 엄마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네가 이렇게 신나서 갈 줄은 몰랐다. 이젠 내 인생 끝이야. 장례식만 남아 있지. 난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차분하고 진실한 '보이후드'에서 가장 격정적이면서 슬픈 장면이다.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어느덧 성장한 아이를 떠나보내면서 문득 허망함을 느끼게 되는 부모 세대의 상실감에 온도와 습도를 적절히 지닌 시선을 줌으로써, 뒤로 물러날 세대의 뒷모습을 향해 사려 깊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대학교가 있는 도시를 향해 아들이 차를 몰고 갈 때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는 이렇다. "날 보내주세요. 당신만을 위해 살 수는 없어요. 세상과 맞서 싸워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인생에 뭔가 더 거창한 게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시간은 흘러 아이는 어른이 되고 제 몫의 힘겨운 싸움을 치른 끝에 한숨을 내쉬며 미래에 설레는 또다른 아이를 도로 한 가운데 앞세우고서 길섶으로 물러선다. 링클레이터는 그런 교체의 순간에 그저 탄식하거나 마냥 들뜨지 않는다. 삶과 삶이 이어지는 그 유구한 흐름 자체를 영화에 담고 싶어할 뿐이다.

'머니볼'의 빌리가 여러 선입견에 맞서 야구단을 개혁하는 과정은 기득권 세력과 혁신 세력의 갈등을 상징한다.
'머니볼'의 빌리가 여러 선입견에 맞서 야구단을 개혁하는 과정은 기득권 세력과 혁신 세력의 갈등을 상징한다.

‘머니볼’

2012년, '아티스트' 대신에 '머니볼. 메이저리그 야구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단장은 만년 하위인 팀 성적을 올리기 위해 분석을 거듭한 끝에 오로지 출루율만 따져서 팀을 혁신하려 한다. 그러자 야구계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고참 스태프들이 그의 견해에 맞선다. 베테랑 스카우터는 이렇게 내쏜다. "컴퓨터로 팀을 짤 순 없어. 야구가 숫자나 과학이면 누구나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일반인들에겐 없는 경험과 직관이 있다고. 설명 못할 뭔가가 우리에겐 있어." 단장이 응수한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고교 선수들을 보면서 그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지. '아드님은 재능이 있어요. 저는 딱 보면 압니다.' 그러나 당신은 몰라."

정말 오랜 경험에서만 가능한 통찰이란 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종 그건 자신이 흘러온 세월 주위로 장벽을 쌓아올리고 싶어하는 보호본능이나,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스스로에게 부여해 제 위치를 유지하려는 이기심 같은 것에 두른 포장지에 불과할 수도 있다. 딱 보면 아는 직관 따위는 없다. 그게 상대의 인성이나 재능에 대한 평가든, 작품의 가치나 만듦새에 대한 일갈이든, 판단 자체는 예술이 아니다. 그러니 베넷 밀러의 '머니볼'은 단지 하위 팀이 결국 뛰어난 성적을 내는 과정을 그린 짜릿한 스포츠 영화가 아닐 것이다. 이건 견고한 타성과 기득권에 맞서서 어떻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치열한 사회 드라마다.

'블랙스완'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발레리나를 그린다.
'블랙스완'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발레리나를 그린다.

‘블랙스완’

2011년, '킹스 스피치' 대신에 '블랙스완'. 이 영화의 발레리나는 예술감독이 '백조의 호수'의 청순한 백조와 사악한 흑조 역을 함께 그녀에게 맡기려 하자 역할에 대한 야심 때문에 광기에 휩싸여간다. 그녀가 빠른 속도로 파멸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간절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욕망이 자신의 능력이나 성향을 추월해 앞서 달려가기 때문이다. "네 자신을 놓아버려"라는 예술감독의 다그침을 그녀는 말 그대로 실현해버린다.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블랙스완'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귀기와 광기가 서린 작품이다. 망상과 현실을 오가는 화법은 종종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고 마음먹은 일 앞에서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라고 절박하게 읊조려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때로는 '기필코'라는 부사가 악마를 만든다.

이동진 영화평론가-B tv '영화당'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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