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칼럼]
최근 몇 회에 걸쳐 채식인들이 외식을 할 때 겪는 곤란함에 관해 썼다. 사실 어떤 식당에 특정한 메뉴가 없다고 항의하기는 어렵다. 갈빗집에 가서 "왜 해물탕이 안 되느냐"고 주장하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이용해 공적인 기능을 띠는 식당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식당 중 하나인 일부 대학교의 구내 식당에서 채식 메뉴를 마련했다는 뉴스가 들린다. 대학 내에서도 채식 메뉴를 찾는 학생의 비율도 있을 것이고, 학교라는 기관의 성격상 교육적인 효과도 있어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 상당한 규모의 프랜차이즈 식당도 소비자의 요구가 커지면 채식 메뉴를 도입하는 게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메뉴를 찾는 고객을 확보하면서 홍보 효과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는 영화 속 명대사처럼 우리는 호의와 권리를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한다. 호의가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배려’라면, 권리는 ‘당연하게 받아야 할 대우’다. 세 끼를 굶지 않고 먹는 것은 복지 국가에서 누구나 누려야 하는 기본권이다.
그렇다면 공적인 기능을 하는 식당도 그 누구의 권리도 침해해서는 안 된다. 병원에서 환자에 맞게 식단을 다르게 하는 것을 ‘호의’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식당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하나하나 고려해 메뉴를 마련해 준다면 그것은 호의지만, 공적인 기능을 하는 식당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것을 식단으로 제공하는 것은 권리 침해다. 채식인들은 자신들이 그 '꽤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 주어야 한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우리는 권리가 침해 당했을 때 "차별당했다"고 말한다. 채식인은 두 가지 의미에서 차별을 경험한다. 첫째는 굶지 않을 기본적인 권리를 존중 받지 못하는 경우다. 채식 메뉴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함에도 현실에선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동물의 권리를 침해하게 되는 경우다. 어떤 이들은 동물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윤리적 이유로 채식을 실천하는데, 채식인으로서의 권리를 무시당하는 것은 동시에 동물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 결국 채식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동물의 권리까지 대변하는 셈이다.
예전에는 "밥상머리에서는 채식에 대한 논쟁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밥상머리에서 육식의 윤리성에 대해 논쟁하다 보면 논리보다는 감정의 싸움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논쟁은 예의 바르고 생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제는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제시하여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다양한 소수자들의 권리 요구가 이루어졌고 그것을 존중하겠다는 후보들의 공약도 줄을 이었다. 이번 대선 기간에 반려 동물에 대한 공약은 봇물 터지듯 나왔지만 그에 견주어 축산 동물의 권리나 복지에 대한 공약은 미약했다. "과도한 육식 문화를 지양하고, 건강 채식 문화를 조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후보들은 필요성에 공감한다는 원론적인 대답에 그쳤다. 반려 동물의 권리를 대변하는 반려인보다 축산 동물의 권리를 대변하는 채식인이 상대적으로 훨씬 적기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동물단체들의 질문에 채식 문화 조성에 관해선 명확하게 답변을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속 가능한 동물 복지 축산 정책'을 약속하며 감금틀 사육의 단계적 금지, 동물 복지 축산 농장에 대한 강력한 인센티브 도입 등을 제시했다. 이른바 '윤리적인' 또는 '양심적인' 육식 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할 일이 많은 새 대통령이지만 이 공약들이 제대로 지켜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것을 감시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최훈(강원대학교 교수, 철학,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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