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시위서 평화집회로
과거 20대ㆍ남성 위주 시위서
사회적 소수자들 참가 늘며
공감ㆍ배려의 ‘집회 인권’ 형성
SNS서 실시간 피드백도
‘최순실, 저잣거리 아녀자’ 칭한
이재명 성남시장 곤욕 치르기도
“주최측ㆍ참가자 성숙해졌단 의미”
“우리는 서로를 배려해야 합니다. 대통령을 비판하지만 여성이라 조롱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양보해야 합니다.”
12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치는 100만 시민들로 가득 찬 서울 광화문광장.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문화제 무대에 올라온 염형철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돌연 ‘경청’을 언급했다. 그는 “집회에 앞서 가족과 참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와 평화적인 행진 제안이 쏟아졌고 우리는 그걸 실현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을 규탄하고 정권을 조롱하던 광장은 일순간 조용해지더니 이내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평화적으로 마무리된 11ㆍ12 촛불항쟁은 집회ㆍ시위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정권 퇴진을 겨냥한 시민들의 저항이 과거와 달리 공감과 배려의 축제로 승화한 건 여성과 가족, 청소년 등 새로운 주체의 등장으로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집회 인권’이 형성됐기 때문이란 평가가 나온다.
사실 12일 집회 현장에서도 참가자들이 눈살을 찌푸릴 만한 장면은 여럿 있었다. 한 남성은 당일 오후 서울시청 인근에서 “망측한 일을 벌인 여자 대통령의 행각이 병신년(丙申年)에 발각됐다”고 소리쳤다. “옳소, 옳소”하는 박수도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반응은 그 다음이었다. “여성과 장애인들도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차별적인 말은 삼가주세요” 등 부적절한 발언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고 호응은 훨씬 컸다.
같은 시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던 중ㆍ고교생들에게 한 중년 남성이 다가가더니 “부모님 허락은 받고 나왔느냐”며 꾸지람을 늘어놨다. 그러자 한 50대 부부가 나서 “학생들도 같은 문제 의식을 갖고 참여한 것”이라며 해당 남성을 설득했다.
달라진 집회ㆍ시위 분위기는 그간 행동에 소극적이던 집회 주체들이 전면에서 나서면서 가능해졌다. 정권 퇴진이란 목표는 같았지만 1970~80년대는 폭력으로 억압하는 독재에 맞서 시민들도 폭력으로 저항했고, 당연히 ‘20대, 남성’ 위주의 시위 문화가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시위대 내부 인권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1ㆍ12 촛불항쟁에는 여성과 청소년, 가족, 장애인, 사회적소수자 등 전 세대ㆍ계층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오면서 참여와 공감이 평화집회의 원동력이 됐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14일 “과거 폭력 시위는 국민의 민주주의 요구를 물리력으로 억누르는 군부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다”며 “이번 평화집회는 시민사회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의미”라고 진단했다.
실시간 문제 제기와 피드백이 가능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확산도 시민들 스스로 집회 인권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날 집회에 앞서 SNS에선 1,2차 촛불집회 때 드러난 문제점을 성토하는 글이 많았다. 지난달 29일 1차 촛불집회에서 연설한 이재명 성남시장은 최순실씨를 ‘근본을 알 수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로 칭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5일 2차 집회에서도 발언자 일부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강남 아줌마” “병신년” 등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쓰자 강한 비판이 제기됐다. 고교생 참가자 김남호(18)군은 “3차 집회에서는 그 간 꾸준히 진행된 자정 노력 덕분인지 나이와 성별 등을 무능 원인으로 돌리는 발언이 적었고 모두가 즐기는 축제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최 측 역시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비하하지 않기 ▦특정 인물의 외모를 언급하지 않기 ▦질병이나 장애를 비유하지 않기 등 집회 전 참가자들이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미리 배포하며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 교수는 “기성 시위문화의 가부장적 단면이 보일 때마다 주최 측과 참가자들이 서로 도와 ‘질서 있는 저항’을 이끈 게 인상적”이라며 “민주사회의 기본 가치가 광장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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