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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감 키우는 태극기 게양 압박.. “애국이 강요로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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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감 키우는 태극기 게양 압박.. “애국이 강요로 되나요”

입력
2016.08.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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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성 애국주의에 뿔난 시민들

강남구 “게양률 90%” 배경에는

주민센터 직원 동원 아파트 순회

20대 국회서 쏟아낸 나라사랑법

무궁화의날 등 대부분 19대 재탕

“취업-주거난 여전한데 충성 강요만”

“보호 확신하면 자연히 국가 믿어”

지난 15일, 광복 71주년을 맞아 열린 한 행사의 장면. 연합뉴스
지난 15일, 광복 71주년을 맞아 열린 한 행사의 장면. 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사는 회사원 박모(31)씨는 지난 15일 광복절 연휴를 만끽하려 늦잠을 청했으나 이른 아침부터 왱왱대는 스피커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광복절을 맞아 반드시 태극기를 게양해 달라”는 안내 방송을 수 차례나 한 탓이다. 박씨는 불쾌한 마음에 항의 전화를 했지만 관리사무소 측은 “(위에서) 지시가 내려와서 한 것 뿐”이라며 “안보 1번지 강남이니 동참을 바란다”는 말만 반복했다. 박씨는 18일 “애국심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데 태극기만 달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줄 아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해마다 국경일이 다가오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이번 광복절에도 일부 지자체가 ‘태극기 게양률 100%’ 운동에 나서는 등 곳곳에서 나라사랑 홍보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정작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은 ‘진정성 없는 무늬만 애국’이라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강남구는 17일 “광복절 관내 태극기 게양률이 90%에 육박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다. 전국 평균 게양률이 10% 안팎인 점을 감안하면 9배 가까운 수치다. 그간 강남구의 태극기 달기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다. 각종 단체ㆍ협회에 동참을 독려하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태극기 바로 알기 및 안보 교육을 하거나 태극기와 얼굴이 나온 인증샷을 제시하면 영화관람 할인 이벤트도 실시했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적극적으로 홍보한 결과 태극기를 다는 가구가 크게 늘었다”며 “게양률 100%를 달성할 때까지 캠페인을 지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태극기 게양이 강요됐다고 지적한다. 강남구 주민 송모(33)씨는 “태극기 게양률을 높이려 구청과 동사무소 직원들이 휴일마다 아파트 단지를 돌며 참여를 요청했다”며 “단독주택이나 빌라에서는 공무원들이 비어있는 게양대에 태극기를 꽂아 둔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강요된 애국 마케팅은 지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20대 국회에서도 광복절을 앞두고 국가(國歌), 국화 등 국가 상징물을 법으로 규정하는 각종 ‘나라사랑 법’이 잇따라 발의됐다. 새누리당 홍문표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박완주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에는 ‘무궁화의 날’을 지정하고 보급ㆍ활용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애국가 제창 및 연주에 필요한 사항을 시행령으로 정하자는 법안도 나왔다. 대부분 19대 국회에서 논의 대상조차 못 돼 폐기된 법안들이다. 최근에는 행정자치부가 모바일 메신저에서 친구로 행자부를 추가한 네티즌에게 태극기를 흔들거나 “사랑해요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는 이모티콘을 제공해 ‘국뽕(맹목적 애국주의를 비꼬는 속어)’ 논란이 일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올해 1월 국가공무원법 개정안 중 공직가치 조항에 민주성, 다양성, 공익성을 삭제하고 애국심만 넣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사실상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해 애국을 강요하는 모양새라 시민들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취업ㆍ주거난 등 생존 자체를 걱정하는 계층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조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행태라는 비판이 많다. 취업준비생 김민석(26)씨는 “학창 시절에는 입시걱정, 대학에선 취업걱정, 취업 뒤에는 결혼과 육아걱정을 해야 하는 나라에 살며 남아 있던 애국심도 사라질 판”이라고 꼬집었다. 주부 백모(41)씨도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말하지 않아도 국가를 믿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 상에서는 ‘1970년대처럼 영화관에서 애국가를 틀고 국기하강식도 법제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 소리도 나오고 있다. 회사원 이모(27ㆍ여)씨는 “이미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태극기 사진을 올리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애국심을 표현하고 있는데 정부가 이를 획일화하려는 것은 개발독재 시대에서나 볼 법한 공권력 남용”이라고 비판했다.

문화비평가인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나라사랑 행위를 규격화하고 강요해서는 애국심이 생기지 않는다”며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정부 정책이 선행돼야 태극기를 권위가 아닌 친근함의 상징으로 여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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