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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차라리 호구가 될지언정

입력
2017.05.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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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고 이용해 먹는 사람이 다수일 때 정직하게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호구가 된다. 하지만 신뢰는 한 국가의 행복도를 결정하는 제 1 요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속이고 이용해 먹는 사람이 다수일 때 정직하게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호구가 된다. 하지만 신뢰는 한 국가의 행복도를 결정하는 제 1 요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몇 해 전 은행 ATM 앞. 인출 금액 10만원을 누르고, 무슨 딴생각을 그리 했을까. 뚜루루루룩, 돈 세는 기계음이 들린 후 카드와 영수증을 뽑아 나왔다. 돈은 그대로 기계에 둔 채였음을 깨닫기까지 고작 1~2분. 뒷사람의 흐릿했던 실루엣을 떠올리며 재빨리 돌아간 현금인출기에는 그러나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청원경찰에게 혹시 주인 없는 돈을 맡긴 사람이 없는지 물으니, 금시초문의 당황한 표정. CCTV를 확인해본 청원경찰의 말인즉슨, 돈을 찾을 방법이 없다고 했다. 뒷사람이 아무 거래를 하지 않은 채 돈만 집어 돌아섰기 때문에 인적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100만원이 아니라 10만원이었던 걸 다행으로 여기며 하루 종일 씩씩대던 내게 친정엄마는 말했다.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잘못이다!” 이렇게 이중으로 억울할 수가.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길에서 잃어버린 지갑을 되찾는 비율을 국제 비교하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50달러의 돈을 지갑에 넣고 이름을 표시한 후 1,100개를 길거리에 떨어뜨려 놓는 거다. 그 다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인을 찾아주는지를 관찰하는 실험이었다. 전체 평균 회수율은 50%를 약간 웃도는 수준. 그러나 한 푼도 없어지지 않은 채 지갑 회수율 100%를 기록한 곳이 있었으니, 인구 13만의 덴마크 북부 도시 올보르. 덴마크식 행복의 비결을 전 세계에 알리고 다니는 작가 말레네 뤼달에게 이런 초고도 신뢰사회를 만드는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신뢰가 행복의 제 1조건이지만, 어떤 국가도 신뢰사회를 출범시킬 수는 없어요. 개개인이 먼저 시작해 신뢰의 거대한 원을 형성해야 하는 거죠. 바로 당신부터요.”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한 사회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사회자본(Social Capital)을 꼽는다. 사회자본이란 상호 이익을 조정하고 협동을 촉진하기 위해 필요한 신뢰, 규범, 네트워크로, 이 중 가장 중요한 게 신뢰다. 미래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도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라며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의 급격한 증가로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한다”고 말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OECD ‘2016 사회지표’에서 정부신뢰도 34개국 중 29위, 타인에 대한 신뢰 35개국 중 23위를 차지한 저신뢰 국가다. 어느 해 겨울, 의사인 친구 남편은 모피코트에 명품백 든 노인들이 의료급여 수급권자로 의료쇼핑을 온다며 기사 좀 써달라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저소득 국민의 의료비를 국가가 부담하는 의료급여 수급권자 자격을 자산 명의이전 등을 통해 불법으로 취득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서울 부자동네로 이사한 친한 후배 하나는 아파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국공립 어린이집에 빨리 입소할 수 있는 전업주부 꿀팁’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맞벌이 가산점을 얻기 위해 시아버지 회사, 남편 사무실 등에 ‘가라 직원’으로 위장해 취업증명서를 받은 후 대기순위 2,000번대 아이를 어린이집에 밀어 넣은 걸 자랑스레 비법이라고 올린 거였다. 나중에 안면 트고 보니 죄다 아우디, BMW 타고 다니며 충분히 집에서 아이 돌볼 형편이 되는 사람들이었다.

억척스럽게 치고 나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던 엄혹한 시절을 너무 오래 겪은 나머지, 흥남철수 시절의 전쟁고아 멘탈리티가 DNA에 새겨진 건지도 모르겠다. 이용해 먹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고 호구라는 인식이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여기서도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의심이 들 때 나만 홀로 정직하기란 여간 외롭고 분한 일이 아니다.

정권교체가 열어젖힌 새 시대. 정부만 잘한다고 해서 나라가 절로 좋아질까. 아무리 좋은 제도와 시스템이 만들어져도 신뢰가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 각자가 좋은 시민이 되지 않는 한 좋은 사회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 정부의 성공을 비는 한 방편으로, 스스로 좋은시민되기운동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차라리 호구가 될지언정 이 나라의 사회자본을 높이기 위해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다짐으로 남이 흘리고 간 10만원은 반드시 찾아주겠다는 그런 결의를 다진다면…. 아, 아름다워라, 나의 조국!

박선영 기획취재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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