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온라인상의 여성혐오를 둘러싸고 터져 나온 갈등을, 우화의 형식을 빌려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전 이야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김치녀, 아니 진짜 김치가 되어버린 썸머. 장독에서 깨어난 그는 장독대 안에 함께 갇힌 김치녀1을 만난다. 그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하루를 곱씹어보다가 자신에 대한 김치녀란 낙인을 벗어나기로 결심한다. 장독을 탈출한 그녀는 김치를 묻으러 온 한 남자를 맞닥뜨리게 되는데... (▶1회 보러가기)
“너... 김치... 왜 나왔지....?”
그는 썸머를 노려보며 장갑을 꼈다. 썸머는 두려움에 숨이 턱 막혔다. 남자는 삽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로 내리쳤다. 썸머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팔다리, 아니 그녀의 배춧잎은 노끈으로 꽁꽁 동여매어 있었다. 썸머는 모닥불 앞에 앉은 그의 뒷모습을 봤다.
“당신 대체 누군데 나를 묶어둔 거야? 저 장독대들은 또 뭐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 나는 김치녀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넌 김치녀다. 한국, 김치녀 많다. 격리시킨다. 김치녀...김치녀...”
그는 뭔가 불안한 사람처럼 띄엄띄엄 김치녀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썸머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대체 왜 김치녀를 만들고 낙인찍는 거야?”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웃었다.
“계몽. 계몽하는 보람이다.”
“김치녀들은 계몽이 필요하다. 스..스타벅스에 가고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를 하는데 나..남자에겐 집값을 부담하게 한다. 남자가 군대 간 동안 교환학생 가서 외국...외국인이랑 데이트도 하면서 군대 간 노고는 인정 안 해준다. 남자가, 남자가 다 책임진다. 그런데 고마운 줄도 모른다. 남자가 더 힘든데 여자만 대우 받는다. 화가 난다. 정말 화가 난다.”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거야?”
“그렇다.”
그는 억울해보였다. 썸머는 그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첫 번째로 그는, 경제적으로 남자가 더 많이 부담을 져야 한다는 관습에 문제를 이야기했다. 두 번째로는 군 생활을 하면서 잃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보상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셋째로 그는 남자가 모두 책임을 지는데 여자만 대우 받기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썸머는 이 세 가지 이야기를 다시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가 문제라는 거지?”
“말하자면 그렇다.”
“이해가 안 가. 이 세 가지 어디에 ‘여자’가 문제라는 단서가 있어? 여자가 문제라서, 김치녀가 문제라서, 차별하고 격리시키면 해결되는 문제가 이 셋 중에 대체 뭐야?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잖아. 큰 결혼비용이 부담스러우면 그걸 줄이고 나누자고 이야기할 생각을 해야지. 눈치보고, 자기가 데이트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할까봐 두려운 마음을 ‘혐오’로 표현하는 거야? 군 생활에서의 손실을 이야기하는데 왜 군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김치녀를 이야기하는 거야? 남자가 모든 책임을 지는데 여자가 대우 받는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돼.”
썸머는 김치 국물을 튀기며 말했다.
“우리나라의 성평등지수는 117위(2014 세계경제포럼(WEF) 세계 성 격차 보고서 기준)야.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은 50.5%(2015년 1분기). 남성과는 20%포인트 이상 차이 나. OECD 가입국가 중에서 꼴찌. 넌 여성이 대우 받는다고 생각하니? 정말 여성이 대우 받는다고 생각해?”
열악한 상황을 ‘여성’이 만든 것도 아닌데 김치녀 관리자는 모든 상황을 개념 없는 여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계몽으로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그는 생각한다고 했지만 그건 ‘순종’을 요구함에 다름 아니었다. 대화로 관습을 바꾸는 게 아니라 뒤에 숨어 편집된 사실을 다수와 공유하면서 ‘김치녀’라는 대상에 대한 혐오를 키운다. 그 혐오로 누군가를 깔아뭉개고 기죽게 하는 것이 관리자라는 녀석이 원하는 일이었다. 억울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대상이 필요할 뿐이었다. 이유야 찾기 나름이다. 눈 부릅뜨고 찾으면 먼지 하나 없을 리 없다.
김치녀 관리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썸머에게 다가왔다. 다시 한 번 삽으로 그녀를 내리쳤다. 그는 썸머를 플라스틱 김치통 안에 담았다. 얼굴이 구겨지고 꼼짝도 할 수 없는, 숨조차 쉬기 어려운 곳이었다. 김치녀 관리자는 그 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모닥불을 바라봤다. 저녁이 깊어갔다. 작은 나뭇가지들이 불쏘시개가 되었다.
김치녀 관리자가 입을 떼었다.
“ 여자를 그려줘.”
“....뭐?”
그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나 되는 듯이 소곤소곤 다시 되풀이해 말했다.
“ 부탁이야. 여자를 한 명 그려줘.”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마주하게 되면 누구나 거기에 순순히 따르기 마련이다. 그는 김치 통을 열어줬고 썸머는 펜을 들고 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안 돼! 이 여자는 벌써 김치녀인 걸. 결혼 후 아침식사를 대충 빵으로 해결할 것 같잖아. 다시 하나 그려줘.”
썸머는 다른 여자를 그렸다.
“봐. 이건 결혼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잖아. 너무 남자를 많이 만났어. 나이도 많아. 스물다섯은 족히 넘어보이는 걸. ”
“그러는 넌 몇 살인데?”
“.... 스시녀를 그려줘. 다시 그려달라고.”
썸머는 스시녀를 그려주며 이야기했다.
“일본에서 황혼 이혼이 화제가 되는 걸 알고 있어? 삶의 동반자를 찾는데 ‘순종’을 전제로 하는 게 얼마나 상대를 구속하는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는 시무룩해져선 스시녀 그림을 내려놓았다.
“그럼 다른 걸 하나 그려줘.”
썸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되는 대로 그림을 끼적거려 놓고는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는 여자는 그 안에 있어.”
그러자 까다로운 김치녀 관리자의 얼굴이 환히 밝아지는 걸 보고 썸머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 이 여자가 좋아. 네 덕분에 내가 원하는 여자가 생겼어.”
그가 그림을 들고 좋아하는 사이, 저 멀리에서 성냥불만한 빛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횃불을 든 무리였다.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 이기야!”
썸머는 소문으로 들어 그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메갈리안. 그들은 김치녀를 만드는 자들을 쫓아다녔다. 그들의 무기는 ‘거울’이었다.
“김치녀 관리자 나오라 이기야!”
김치녀 관리자는 삽을 들고 메갈리안(관련 기사) 을 향해 나가갔다. 싸움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 김치녀들. 못 생기고 A컵에 사치 부려서 남자도 못 만나고 남자 만나면 샤넬백 사달라고 하면서 등쳐먹고 남편 아침상은 빵으로 때울 김치녀들! 우리나라의 훌륭한 군인들을 무시하고 여성 전용 좌석에 앉으면서 특권을 누리는 염치없는 ‘일부의’ 김치녀. 그게 너희야!”
김치녀 관리자가 씩씩대며 랩을 읊었다. 메갈리안의 수장은 거울을 꺼내들었다.
“이 김치남. 파오후-메갈리안에서 김치남을 비하할 때 쓰는 말-에 여자도 못 만나고 여자 만나면 아무 때나 더치페이 외치면서 만나는 여자들 김치녀 취급하고 아내 시댁에 데려가 하녀처럼 부려먹고 고마운 줄도 모를 김치남! 몰카로 여자 훔쳐보고 성적 대상화하면서 여자 때리고 성매매하는 김치남들. ‘역차별’ 운운하며 지들 특권을 누리는 염치없는 ‘일부의’ 김치남. 그게 너희라 이기야!”
거울이 ‘반짝’하고 빛났다. 김치남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변 장독이 들썩거렸다. 장독 안에 갇힌 김치녀들도 이 싸움을 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쩡-’
독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뒷마당으로 이어진 들판은 온통 김칫국물로 빨갛게 물들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썸머는 김치녀들과 숲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득하니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썸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썸머는 자신의 방,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썸머는 어제 아침 자신이 깼던 뒷마당으로 나갔다. 조금 전 자신이 보았던 아수라장은 온데 간데없었고, 몇 개의 장독이 어제와 같이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이었다. 썸머는 자신이 잠을 깼던 장독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장독을 열었다. 장독에는 어제와 똑같이 배추김치가 담겨 있었다. ‘그럼 그렇지. 헛꿈이었군.’ 썸머는 김칫독을 닫으려 했다. 그 때 독 안쪽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독 한 편엔 그녀가 보지 못했던 한 포기의 총각김치가 소담스레 담겨있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