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와 30년 함께 산 첫 부인 제인 와일드가 쓴 자서전 영화화
때로는 배우 한 명의 연기가 영화 전체를 압도한다. ‘나의 왼발’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나 ‘넘버 3’의 송강호처럼. 10일 개봉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과학자 스티븐 호킹(72)을 연기한 에디 레드메인도 마찬가지다.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 배우의 연기에 스스럼 없이 기립박수를 치게 되는 감격의 순간을 이 영화에서 경험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역경을 딛고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물리학자에 대한 전기영화이자 학문적 성취만큼 눈부신 사랑을 했던 부부에 관한 로맨스영화다. 호킹과 결혼해 30년간 함께 살았던 제인 와일드가 쓴 ‘영원을 향한 여정: 스티븐과 함께한 시절’을 바탕으로 제작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아내의 시점이 많이 반영돼 있다. 제작사는 ‘러브 액츄얼리’, ‘레미제라블’, ‘어바웃 타임’ 등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워킹타이틀이다.
영화는 스티븐과 제인(펠리시티 존스) 두 청춘남녀의 풋풋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신을 믿지 않는 괴짜 물리학도와 영국 국교회를 믿으며 외국어를 공부하는 여자.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 서로에게 끌린다.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론을 찾아 헤매던 호킹은 루게릭병에 걸려 2년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좌절한다. 시간을 뒤로 돌려 태초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 탐구하며 현실의 시공간을 넘어서려던 남자가 바로 그 안에 갇힌 것이다. 현대물리학의 시간과 공간 개념을 사랑이란 초월적 감정으로 풀어낸 ‘인터스텔라’처럼 이 영화도 시간을 뛰어넘는 사랑을 보여준다.
영화는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호킹이 1988년 ‘시간의 역사’를 내놓기까지 25년의 세월을 그린다. 더 이상 글을 쓸 수도, 두 다리를 쓸 수도, 음식을 씹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게 되는 비극적 상황을 외면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으면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펼쳐 간다. 온몸의 근육이 죽어버린 극한의 상황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는 불굴의 의지에 감동하게 되고,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선택한 뒤에도 세 아이를 낳으며 꿋꿋하게 남편을 지킨 인고의 시간에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슬픔과 고통을 삼키고 또 삼키는 펠리시티 존스의 연기도 칭찬 받아 마땅하지만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레드메인이 집어삼킨 영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루게릭병의 진행에 따라 호킹의 몸이 겪는 변화를 레드메인은 컴퓨터로 분석하듯 정밀하게 묘사한다. 레드메인이 진짜 호킹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사실적이다.
레드메인은 호킹이 겪었을 만한 감정의 우주까지 미세한 표정의 변화로 포착해낸다. 이 연기를 위해 호킹에 대한 논문과 다큐멘터리, 유튜브 동영상 등을 수집해 연구하는 한편 루게릭병 환자와 전문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병의 진행 단계를 세분화해 차트에 기록하며 연기할 정도였다. ‘오늘 장면은 말하기 능력 레벨4, 운동 능력 레벨3이고 내일은 10년 후니까 말하기 능력 레벨6, 운동 능력 레벨7이겠군’ 하는 식으로.
영화가 완성된 뒤 제작사 사무실에서 이 영화를 본 스티븐 호킹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간 뒤엔 제임스 마시 감독에게 “내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소감을 이메일로 보냈다니, 레드메인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이상의 보상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 12세 이상 관람 가.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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