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서 70년 만에 장례식
정병호 대표 "용서해주십시오" 회한… 일본측 대표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외할아버지 유골 못찾은 손영진씨 "이사도 안 가던 외할머니 恨 사무쳐"
日에 묻힌 희생자 수천명 추정… 정 대표 "정부, 집계조차 안 해"
“외할머니는 1928년 일본 순사에 끌려간 남편과 시동생이 행여나 찾아올까 돌아가실 때까지 서울 쌍문동을 한시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외할머니 김영문씨의 사연을 전하는 손영진(65)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외할머니는 홀로 호떡 장사를 하며 손씨 어머니를 낳아 키웠다. 가족이 외할머니의 시동생 안태복씨의 소식을 들은 건 지난해였다. 안씨는 1943년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비바이(美唄) 탄광에서 혹독한 노동 끝에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매불망 남편과 시동생의 소식을 기다리던 외할머니는 2005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뒤였다.
19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합동장례식에는 손씨처럼 강제징용의 한을 간직한 가족들의 사연이 한가득했다. 이날 행사는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로 끌려가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숨진 조선인 115명의 유골을 3,000㎞가 넘는 여정 끝에 한국으로 모셔와 넋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손씨는 “외할머니는 남편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끝까지 버티셨던 것 같다. 결국 만나지 못한 게 한이 됐는지 임종 때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셨다”며 끝내 눈물을 흘렸다. 광복 후 70년이나 흘렀지만 외할아버지 태산씨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장례식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뒤늦게 조상의 유골을 찾은 데 대한 사죄의 의미로 ‘백지 만장(輓章ㆍ죽은 이를 기리는 글을 적은 깃발)’이 운구 행렬을 이끌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탓에 장례식에 참여한 유족들은 3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원봉사 대학생 115명이 흰색 보자기에 쌓인 유골함을 들고 장례식장에 들어서자 1,000여명의 시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애도를 표할 정도로 이날 행사는 관심을 끌었다.
유해 발굴을 주도한 시민단체 ‘강제노동희생자 추모ㆍ유골 귀환 추진위원회’의 한국 측 대표인 정병호(60)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축문(祝文)을 통해 “일본 탓만 하고 정부만 바라보며 우리가 할 수 있던 일을 하지 못한 저희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회한을 드러냈다. 일본 측 대표인 승려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ㆍ70)씨는 “희생의 책임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정부와 강제 사역을 시킨 일본 기업들에 있다”며 명백한 사죄를 표명했다.
앞서 추진위는 지난 11일 홋카이도로 떠나 강제노동 현장인 아사지노(淺茅野) 일본군 비행장, 슈마리나이(朱鞠內) 우류댐 등을 돌며 유골을 환수했다. 그 동안 간헐적으로 강제 징용자의 유골이 돌아오긴 했으나 100위가 넘는 유골이 한꺼번에 봉환된 것은 처음이다.
유족들은 깊은 감회를 드러냈다. 부친의 유골을 되찾은 김설옥(73ㆍ여)씨는 “한 살 때 아버지가 끌려가서 기억은 거의 없지만 이제 명절 때마다 찾아갈 묘소가 생기게 돼 큰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삼촌 김일중씨의 장례를 치른 경수(65)씨는 “일본 전역을 돌면서 70년 전 징용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게 돼 뜻깊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아직 땅속에 잠들어 있는 유골 발굴을 서둘러야 한다는 바람도 이어졌다. 정병호 교수는 “고령인 유족들이 잇따라 사망해 지난해에는 연락이 됐지만 올해는 안 된 경우도 허다하다”며 “일본에 묻혀 있는 희생자가 수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정부는 집계조차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115인의 넋은 20일 오전 경기 파주 서울시립묘지에 안장돼 고국의 품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납골당에는 가수 정태춘씨가 강제노동 희생자를 위해 만든 ‘징용자 아리랑, 달아 높이 곰’이란 노래 가사와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쓴 ‘70년 만의 귀향’이란 글귀가 동판에 새겨졌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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