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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하라고?… 우물 길렀던 박혜경의 인생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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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하라고?… 우물 길렀던 박혜경의 인생역전

입력
2017.03.04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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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박혜경은 밴드 러브홀릭 멤버인 강현민과 인연이 깊다. 박혜경은 “시골에 살 때 어머니 식당에 강현민이 왔다”며 “그의 음악을 좋아해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서울에 찾아가 록 음악을 써달라고 했다”면서 웃었다. 더그루브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수 박혜경은 밴드 러브홀릭 멤버인 강현민과 인연이 깊다. 박혜경은 “시골에 살 때 어머니 식당에 강현민이 왔다”며 “그의 음악을 좋아해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서울에 찾아가 록 음악을 써달라고 했다”면서 웃었다. 더그루브엔터테인먼트 제공

“미성? 전 박경림과죠!”

박혜경은 봄을 닮은 상큼한 목소리로 유명한 가수다. 1997년 밴드 더더로 데뷔 곡 ‘딜라이트’를 냈을 땐 ‘요정’으로 통했다. “딜라이트, 딜라이트 인 마이 하트~” 가녀린 목소리는 마치 주문을 걸듯 신비로웠다.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아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마주한 박혜경의 생각은 달랐다. “제 목소린 미성이 아니라 탁성에 가깝죠.” 그의 도발(?)은 계속 됐다. 청아한 노래로 유명한 가수는 자신의 목소리를 사포 같이 까칠한 방송인 박경림의 목소리와 비교했다. “(박)경림이 인 척 하고 박수홍씨한테 전화했는데, 박수홍씨가 ‘어, 경림아’라고 했다니까요.” “어려선 내 목소리가 싫었다”는 박혜경은 “고등학생 때 판소리를 배웠는데, 선생님이 탁성을 알아보고 창을 하란 권유도 했다”는 뜻밖의 얘기도 털어놨다.

노래가 아닌 일상적인 대화에서 박혜경의 낮고 거친 소리는 더욱 도드라졌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매끈함 속 까칠한 목소리”가 박혜경의 진짜 매력이라는 게, 그의 솔로 데뷔 곡을 써 준 그룹 러브홀릭 멤버 강현민의 말이었다. 그가 애초 달콤한 분위기로 작곡한 ‘주문을 걸어’는 박혜경의 탁성을 살리기 위해 록 스타일로 180도 바꿔 성공한 사례였다.

성대 물혹으로 2년 동안 목소리 잃어… “가수 포기하려 해”

박혜경은 달콤 쌉싸름한 느낌을 동시에 지닌 보물 같은 목소리를 4년 전 잃을 뻔 했다. 성대에 물혹이 크게 생겨 “2년 동안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는 피부관리숍을 양도하는 과정에서 소송에 휘말리면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됐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충격이었죠.” 성대 수술 후에도 한동안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와 박혜경은 “가수를 그만두려 했다”며 지난 고충을 털어놨다. 그는 “사람이 두려워”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 살기도 했다. “흰 머리가 여럿 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해” 내린 결정이었다.

목소리를 되찾기까지 “피나는 재활 훈련”이 필요했다. 수술 뒤 2년 넘게 성대 훈련을 하며 원래 목소리의 80%를 간신히 되찾았다. “말 해야 하는데 네 앞에 서면”으로 시작하는 ‘고백’의 고음을 내는 일도 가능해졌다.

그는 쉽게 얻은 것이 없었다. “영화 ‘워낭소리’에서 나올 법한” 전북 진안의 한 시골 마을에서 “우물에서 물을 길며” 살던 소녀는 가수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 왔지만, 여러 음반사에서 번번히 퇴짜를 맞았다. “록 음악을 하고 싶다면서 목소리가 왜 이러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짐승 같이 포효하는 목소리로 터질 듯이 드럼을 연주하는 헤비메탈이 유행하던 시기라, 잔잔한 분위기의 모던 록을 하고 싶은 박혜경은 설 자리가 없었다. 1995년 한 음반사가 주최한 ‘대학생 팝 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뒤엔 대표로부터 “트로트 앨범을 내자”는 요구를 받곤 회사를 나왔다. 박혜경은 서울 서대문구의 유명한 록 카페인 우드스탁을 찾아갔고, 김영준을 만나 혼성듀오 더더를 결성해 결국 스스로 꿈을 이뤘다. 그의 고집은 통했다. 박혜경이 부른 ‘너에게 주고 싶은 세가지’, ‘잇츠 유’ 등 무려 38곡이 광고에 삽입돼 인기를 누렸다. 박혜경은 2000년대 초반 ‘광고 음악 섭외 1순위 가수’였다. 그는 “광고 음악을 많이 불러 돈 많이 벌었을 거라고들 묻는데, 그땐 가창료(노래를 부른 사람에게 따로 돈을 주는 것) 개념이 없어서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며 웃었다.

가수 박혜경은 "원조 '볼빨간 사춘기'란 네티즌 댓글이 재미있더라"며 웃었다. 더 그루브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수 박혜경은 "원조 '볼빨간 사춘기'란 네티즌 댓글이 재미있더라"며 웃었다. 더 그루브엔터테인먼트 제공

인디 음악인과 손 잡은 박혜경의 변신

박혜경은 올해 다시 모험을 시작했다.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네 가지 콘셉트로 신곡을 내는데, 첫 곡을 인디 음악팀인 롱디에게 받았다. 어느 날 밤, 음원 사이트를 뒤지다 롱디의 음악을 우연하게 듣고 반해, 바로 러브콜을 보냈다. 박혜경은 “지난해 여름부터 20주년 기념 앨범 프로젝트를 위해 수십 곡을 받았는데, 대부분이 아이돌이 더 잘 부를 노래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롱디와 함께라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며 두 청년과 함께 작업하게 된 계기를 들려줬다. 박혜경이 롱디와 지난달 낸 신곡 ‘너드 걸’은 아날로그 전자음악을 기반으로 한 리듬앤블루스(R&B) 스타일의 곡이다. 박혜경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다소 빠른 비트의 노래지만, 의외로 리듬을 능숙하게 타 곡의 감칠맛을 살린 점이 흥미롭다.

곡 제목에 쓰는 영어 ‘Nerd’는 한 가지 일에 깊이 빠져 세상 일에 어두운 이를 일컫는다. 박혜경은 요즘 천연비누를 만들고 꽃을 장식하는 일에 빠져 있다. 마이크를 내려 놨을 때 “돈을 벌기 위해” 차까지 팔아가며 프랑스로 건너 가 배운 일이 ‘낙’이 됐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에게 찾아온 행운이다.

“주위에서 다들 리메이크를 말렸지만 ‘레몬트리’를 불렀고, 반응이 좋았어요. 항상 편견과 싸웠죠. 누군가의 입맛에 끌려 노래하진 않았어요. 제 음악의 영원한 타깃은 청년인 만큼,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맛’의 노래를 들려드릴게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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