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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머니는 행복하시다

입력
2017.08.1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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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위는 홍콩의 서민 동네다. 고층아파트가 밀집해 있는데 야경으로만 보면 꽤 근사하다. 허안화 감독의 ‘천수위의 낮과 밤’(2008)은 그 동네 이야기다. 얼마 전 영상자료원에서 보았는데 영화의 잔상이 오래간다. 열대야로 뒤척일 때면 모자 두 식구가 소찬에 말없이 밥을 먹던 식탁의 이상한 평화가 자꾸 떠올랐다. 어머니 정 여사의 그 둥글고 선한 얼굴은 요즘 내가 자주 보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고로상의 점잖고 착한 얼굴과 함께 잡사에 지쳐가는 마음에 큰 위안이다. 영화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좁은 거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켜고는 다시 잠이 드는 소년의 모습을 천천히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맥가이버 머리를 하고 있는 잘생긴 소년은 일견 문제아 같다. 대형마트 매장에서 일하고 돌아온 어머니를 맞을 때도 종일 집에서 게으르게 뒹군 티가 역력하다. 우리는 알게 된다. 지금 아들 가온은 방학 중이고 수능시험을 치른 뒤 점수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공부는 잘하는 것 같지 않지만 착하다. 달걀이나 신문 심부름 등 엄마를 말없이 잘 돕는다. 아버지는 가온이 어릴 때 병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니까 모자 단 둘의 편모 가정이다. 영화는 천수위의 작고 허름한 서민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하루하루를 조용히 따라간다.

이럴 때 우리는 ‘가난’이나 ‘불행’의 프레임을 떠올리는 데 익숙하다. 가령 소년이 엇나가거나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서 그렇지 않아도 고달픈 하층의 생활은 더욱 악화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태의 폭력적 전개에도 우리는 얼마큼 익숙하다. 아파트 같은 동에 이사 온 장 할머니는 혼자 산다. 전구를 갈지 못해 어둑한 부엌에서 혼자 먹을 음식을 요리한다. ‘가족 해체의 어두운 현실’이니 고독사 같은 말이 쉽게 발설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시선에는 그런 틀이 없다. 문제의 사회적 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주로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천수위는 홍콩 내에서도 빈곤, 실업, 폭력 등의 문제가 심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중간중간 정 여사나 장 할머니 세대가 살아온 지난 시절의 풍경을 사진으로 보여주는데 일제히 하얀 머릿수건을 한 여공들의 모습이 우리네 70년대를 연상시킨다. 정 여사도 일찍 학업을 접고 공장에 취직해서 남자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했던 모양이다. 정 여사의 신문 읽기는 아마도 그렇게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학업에 대한 아쉬움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영화는 정 여사가 장 할머니의 장보기를 도와주고 아들과 함께 할머니네 부엌 전등을 갈아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마트에 취직하면서 두 사람은 더 가까워진다. 배달비 때문에 장 할머니가 티비 구입을 망설일 때도 아들을 부르고 가온은 씩씩하게 달려와 설치까지 마쳐준다. 할머니는 아껴두었던 버섯을 꺼내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가온은 바쁜 엄마 대신에 입원한 외할머니에게 열심히 죽을 배달한다. 학교 동아리 모임에서 어머니는 행복하신 것 같다고 대답한다. 어머니는 어느 저녁 먼저 떠난 남편을 생각하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왜 고단하고 외롭지 않으랴.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마주하는 모자의 간소한 식탁에는 설명하기 힘든 온기가 있다. 이것은 삶의 동화적 포착과는 무관하다. 살아간다는 일의 소중함과 느꺼움 앞에서 감독의 시선은 겸허하기만 하다. 장 할머니가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딸은 손자를 남기고 세상을 떴고 사위는 재혼을 했다) 정 여사가 동행하는데, 이 여정이 보여주는 가슴 아픈, 그러나 참으로 깊고 따스한 두 여성의 연대의 풍경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 하리라. 그래, 삶은 언제든 개념화한 가난이나 사회학적 불행보다 더 크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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