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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인물] <2> 최병하 경주최씨 대종회장 “최순실이 경주 최씨냐는 통에 혼났습니다, 정답은 아니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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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 인물] <2> 최병하 경주최씨 대종회장 “최순실이 경주 최씨냐는 통에 혼났습니다, 정답은 아니올시다”

입력
2019.01.3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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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조상 본받아 몸가짐도 말씨도 반듯하게 

 300년 부잣집 자발적 기부로 후손에게는 경주에 땅 한 뼘 남지 않아 

 영남학원과는 풀어야 할 숙제 남아…”설립자는 대학 사유화 원하지 않았다” 

 중시조 최치원 선생이 수학한 독서당 다시 지을 계획 

최병하 경주 최씨 대종회장이 지난달 30일 경주 대종회관 사무실에서 경주 최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인 6훈(訓)을 설명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최병하 경주 최씨 대종회장이 지난달 30일 경주 대종회관 사무실에서 경주 최씨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인 6훈(訓)을 설명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진사 이상 벼슬 하지 마라’ ‘만석 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길손을 잘 대접하라’ ‘사방 100리 내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우리나라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의무)의 본보기로 꼽히는 경주 최부잣집의 육훈(六訓)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는 경주 최부잣집은 임진왜란 때 왜적에 맞서 싸운 1대 최진립(1568~1636) 장군을 시작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댄 후 교육사업에 전액을 기부한 12대 최준(1884~1970) 선생까지를 말한다. 재산을 모두 기부한 탓에 경주에는 직계 후손들이 머물 집 한 채 없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명문 메디치 가문이 200년 부자 소리를 들은 것에 비하면 최부잣집은 최소 300년 부자로 있다 자발적으로 재산을 포기했으니 여느 가문과 비할 바 아니다.

설을 앞둔 지난달 30일 경주시 태평로 경주 최씨 대종회관을 찾아 최병하(82) 대종회장으로부터 최부잣집 얘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대종회는 동성 동본 일가의 모임이다.

대담=전준호 대구한국일보 편집국장

_경주 최씨 직계 후손이 경주에 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다.

“최준 선생이 후손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고 교육사업에 전액 기부했기 때문에 경주에는 집도 땅도 남아있지 않다. 후손이 경주에 내려와도 딱히 머물 곳이 없다.”

_경주 최씨 종가가 있는 교촌도 기부했나.

“30, 40년 전만 해도 쪽샘지구에는 술집이 번창했다. 저녁만 되면 대구와 부산, 울산에서 술 마시러 찾아올 정도였다. 교촌은 물론이고 남산 아래까지 땅과 건물이 있을 정도로 경주 최고의 부잣집이었는데 모두 기부하고 지금은 한 뼘의 땅도 남아 있지 않다.”

_경주 최씨는 어떻게 부자가 됐나.

“전해 내려오기로는 3대 최국선 어른 때부터라고 한다. 궁중 주방인 사옹원의 참봉을 하다 벼슬을 포기한 후 땅을 개간하고 모내기를 하면서 수확량이 직파 때보다 5배는 됐다. 형산강 상류에 있다보니 물을 끌어대기도 쉬웠다. 가훈 때문에 소득이 일정량을 넘으면 소작인에게 돌려주는 인센티브도 생산량 증대에 한 몫 했다. 낙향하면서 주조비법을 전수해 교동법주가 탄생했다고 한다.”

_16, 17세기에 이런 가훈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는다.

“예사로운 가훈은 아니다. 임진왜란 때 나라에 공을 세웠는데도 귀양을 간 경험이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본다. 관직에 대한 욕심을 버린 조상들은 부와 벼슬을 함께 추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미리 깨달았을 것이다. 100리(40㎞)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가훈은 나눔의 철학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집안에서는 사치를 경계했다.”

_부자로는 마지막이었던 최준 선생은 독립운동에도 남달랐다고 알고 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최준 선생은 1914년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와 함께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선생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다 부도 위기도 맞았다. 채무상환 유예조치 기간이 끝나기 전에 광복을 맞으면서 3,000석의 재산을 건지게 됐다. 하지만 선생은 1947년 이 모든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했다.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_경주 최씨 재산은 모두 영남학원에 귀속된 건가.

“바로 잡을 일이 있다. 1947년 최준 선생 등 5명의 명의로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를 설립했다. 1963년 삼성 이병철 회장이 대학을 맡았으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면서 손을 떼고는 헌납을 해버렸다. 1967년 대구대는 청구대와 합쳐져 영남대가 됐는데, 설립자의 역할이 사라지더니 1980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남학원의 재단이사장이 된 것이다. 대학이 국가에 귀속되었다면 모를까, 옳지 않다고 본다.”

_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가.

“후손들이 재산을 욕심내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기부 당시 설립목적에 충실하게 대학의 사유화를 막자는 것이다. 영남학원 측이 기부자들에게 대학을 돌려주면, 기부자들은 국가나 지역사회에 헌납할 수 있을 것이다.”

_대종회 일을 한 지 오래 됐나.

“30년이 넘었다. 1989년 대종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객지 생활을 접고 경주에 터 잡았다. 대종회는 당시 빚이 550만원, 현금은 30만원 뿐으로 월세 10만원에 6.6㎡ 크기의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중시조인 최치원 사당을 하나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대종회 일을 맡게 됐다. 2017년 4월에 회장이 됐다.”

_경주 최씨는 몇 명이나 되나.

“경주에 7,000세대 정도 있는데 한 집에 한, 두 명 살다보니 1만2,000여 명으로 추산한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규모의 성인데, 전국적으로 220만명 정도 살고 있다.”

_대종회는 어떤 일을 하나.

“매년 4월16일 경주 남산 기슭의 고운 선생 사당에게 향사를 드린다. ‘상서장’으로 불리는 이 사당은 고운 선생이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時務十條)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전국 규모의 이 행사에는 일본의 일가들도 찾는다. 이튿날에는 부산 해운대 등 고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둘러본다.”

_경주 최씨 대종회는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할 계획인가.

“최치원 선생이 수학한 독서당이 허물어지고 없다. 대종회 차원에서 바로 세우고 싶다. 궂은 일은 도맡아서 하겠다. 훌륭한 선조들의 명성에 금이 가지 않도록 나이 먹어도 항상 옷차림도 바로 하고 말 한마디도 조심한다. 그런데 최순실이 국정농단 한다는 보도가 났을 때 ‘최순실이 경주 최씨 아니냐’는 전화가 빗발쳐 혼났다. (웃음) 경주 최씨는 아니다.”

정리=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최병하 경주 최씨 대종회장이 지난달 30일 경주의 대종회관 사무실에서 최부자집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최병하 경주 최씨 대종회장이 지난달 30일 경주의 대종회관 사무실에서 최부자집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윤희정기자 yo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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