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이충재 칼럼] 원전 전문가는 가라, 시민이 옳다

입력
2017.07.17 16:09
0 0

가습기참사서 드러난 전문가 무능과 무책임

책임ㆍ윤리 망각한 과학전문가 사회에 해악

생활ㆍ안전 중대사 이제 시민 결정하는 시대

지난 14일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 결정으로 공사가 잠정 중단된 울산 울주군 신고리 5ㆍ6호기 건설현장.
지난 14일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 결정으로 공사가 잠정 중단된 울산 울주군 신고리 5ㆍ6호기 건설현장.

‘안방의 세월호’로 일컫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서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전문가들의 무능과 무책임이다. 1994년 ㈜유공(지금의 SK케미칼)이 처음 제품을 내놓은 이후 17년 동안 감염병ㆍ역학ㆍ화학물질 전문가 가운데 누구도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에 주목하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환자가 하나 둘씩 나오고 2006년에는 집단 발생이라고 할 만큼 어린이와 산모가 병원을 찾았는데도 이들은 손을 놓고 있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업체 편에 서서 가습기 살균제와 폐렴은 상관이 없다는 보고서를 냈고, 국내 최고대학 교수는 돈을 받고 연구 결과를 조작했다. 2011년이 돼서 정부가 역학조사에 나선 것도 상근직원이 두 명에 불과한 시민단체인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거대한 사기극’으로 드러나고 있는 4대강 사업에서도 전문가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사업이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한 ‘한반도 대운하’의 축소판으로 가뭄 극복과 홍수 예방, 수질 개선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권력의 편에 섰다. 우리나라의 토목, 수자원, 물환경 등 학술단체와 전문가 대부분이 4대강 사업 자문위원 자리를 꿰찼다. 2만4,000명의 회원을 둔 국내 최대 학회인 대한토목학회의 경우 단 3명만이 4대강 사업에 반대했다. 22조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에서 파생된 수많은 연구용역이 모두 찬성 쪽 전문가들에게 돌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권력의 압력과 회유를 뿌리치고 4대강 사업의 진실을 밝혀낸 것은 환경단체와 소수의 ‘대항전문가’들이었다.

책임성과 윤리성을 망각한 과학전문가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 메르스 사태 때 정부 대책에 관여했던 의사들은 하나같이 대형병원의 이해를 대변했다. 물대포를 맞고 숨진 백남기씨 사인을 ‘병사’로 기록한 서울대병원에서 권력에 굴종하는 과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의 탐욕과 허위를 바로잡은 것은 평범한 시민과 대항전문가들의 협동적 지성이었다.

정부가 신고리 5ㆍ6호기 공사 중단 여부를 공론조사 방식으로 결정하겠다고 밝히자 원자력전문가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전문가들이 배제된 채 비전문가인 시민들이 최종 결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들은 원전 문제는 자신들 소관사항이라 결정권도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원전사고 우려에 대해서는 가능성 ‘제로’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원전사고는 지진 등 자연재해뿐 아니라 기계 결함과 조작 잘못, 테러 등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원자력전문가들은 예기치 않은 원전사고가 날 경우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고리원전 주변에 사는 수백만 명의 대피방안은 있는지, 핵 발전소 임시저장소는 곧 포화상태가 되는데 사용후 핵연료 처리방안은 무엇인지 등 근본적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난제는 원자력공학이나 물리학, 화학 등 전문분야의 좁은 식견으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다.

그동안 원전은 정부와 산업계의 일방적 홍보로 깨끗하고 안전하고 경제적이라는 왜곡된 인식이 만연해 왔다. 원자력전문가들은 2012년의 고리1호기 전원상실 사고, 2013년 사상 초유의 원전부품 비리사건, 2016년의 원자력연구원 방사능 폐기물 불법매립 사건 등에서는 침묵했다. 원전산업과 정부위원회에 참여한 일부 전문가들은 ‘핵마피아’라는 비난마저 받고 있다.

고등교육 보편화와 정보화의 진전, 생활정치의 부상 등으로 시민의 위상은 달라졌다. 이제 많은 시민은 스스로 전문가가 됐고, 자신의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 시민들이 생활과 안전에 직결되는 중대사를 직접 결정하는 ‘숙의민주주의’는 선진국에서 대의민주주의의 결점을 보완하는 의사결정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민의 참여와 숙의가 없는 정치권력과 전문가들의 결합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지금은 지식엘리트의 시대가 아니고 시민의 시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