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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잉여가 만나 한국미술의 궤적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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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잉여가 만나 한국미술의 궤적을 그리다

입력
2014.11.3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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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능사 기획 '청춘과 잉여'전

1990년대에 청년기 보낸 작가와

오늘의 젊은 작가 2인1조 작업

민중미술 이후 미술계 흐름 조명

'청춘과 잉여'전에 전시된 이상훈의 '정렬 1'. 회화란 매체를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이상훈은 '정렬 1'에서 색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분류해 배치하는 차트 작업을 선보였다. 유능사 제공
'청춘과 잉여'전에 전시된 이상훈의 '정렬 1'. 회화란 매체를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이상훈은 '정렬 1'에서 색을 자신만의 기준으로 분류해 배치하는 차트 작업을 선보였다. 유능사 제공

이자혜의 '페미닌전사 앤니로리의 전설'. 이자혜는 앤니로리가 겪은 다섯 번의 죽음을 보석으로 표현했다. 이 보석은 앤니로리가 페미닌전사가 되려고 문패트를 여신에게 바칠 증거물이다. 유능사 제공
이자혜의 '페미닌전사 앤니로리의 전설'. 이자혜는 앤니로리가 겪은 다섯 번의 죽음을 보석으로 표현했다. 이 보석은 앤니로리가 페미닌전사가 되려고 문패트를 여신에게 바칠 증거물이다. 유능사 제공

"앤니로리는 몇 백 년 전에 태어났던 여인이었다. 앤니로리는 너무나도 멍청했지만 그나마 장점이 있었는데 여러 번 살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었다. (중략) 앤니로리가 지상에서의 추한 삶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열심히 덕을 쌓아 문패트롤 여신의 하수인, 즉 페미닌전사가 되는 방법밖에 없었다. (중략) 앤니로리는 너무 멍청했던 나머지 페미닌전사가 되기 위해서 다섯 번이나 죽어야 했다. 앤니로리는 하여튼 참 다양한 방법으로 죽었으며 얼마나 운이 나빴던지 모두 억울하고 개빡치는 죽음이었다."('페미닌전사 앤니로리의 전설')

절망적인 형태로 변주한 이 신화적 서사는 웹툰 서비스 '레진코믹스'에서 '미지의 세계'를 연재 중인 작가 이자혜가 지어낸 것이다. 이를 벽화로 그려낸 작품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커먼센터에서 열리는 단체전 '청춘과 잉여'전에 선보이고 있다. 스토리텔링을 무기 삼아 여성들의 적나라한 욕망과 이를 억압하는 현실의 괴리를 표현했다. 온라인에서는 ‘겸디갹’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오프라인 전시는 처음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작품은 가부장제를 인류 문명의 역사와 연관 지어 비판해 온 송상희의 작품과 짝을 이룬다. 송상희의 'O를 찾아서'가 번식과 확장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작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역사적 기원을 탐색한다면 이자혜는 A4 한 장짜리 이야기와 2층에서 4층까지 이어지는 벽화 연작을 통해 현실을 보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직관적으로 제시한다.

이처럼 '청춘과 잉여'는 19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작가와 오늘의 젊은 작가를 짝지은 전시다. 두 세대를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주제와 그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나타난다. '청춘'이 1990년대의 낙관주의를, '잉여'는 2010년대 삶의 불안정성을 의미한다. '청춘'으로 호명된 5명은 새로운 시대에 맞서 과거를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번 전시에 임한다. 반면 '잉여'로 불린 5명은 자신의 세계관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집요함, 이른바 '잉여력'을 전술 무기로 삼는다.

이자혜처럼 이번이 첫 전시인 이상훈은 회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분석적인 접근을 매개로 박미나와 대결을 펼친다. 박미나가 현재 시장에 유통되는 검은색 물감들이 각각 다양한 질감을 지니고 있음을 전시하자, 이상훈은 한 술 더 떠 안료 단위로 물감을 분석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그림자에 따라 변화하는 물건의 모습을 기호로 표현해 모눈종이 위에 펼쳐 보이는 회화 제작 매뉴얼 '조영법'도 내놓았다.

반면 정연두와 백정기는 협업을 통해 묘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꿈의 작가'로 불리는 정연두는 2001년작 '내 사랑 지니'에서 사람들이 꿈을 이룬 모습을 합성사진으로 만들어 그들의 현실 속 사진과 병치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 신작 '에어 포켓'에서는 이 합성사진들을 수조에 넣어 수장시켜 버렸다. 전기를 만들어내는 촛불기계 작업을 해온 백정기는 정연두가 수장시킨 사진 주변에 이 장치를 이용해 미약한 기포를 발생시킴으로써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연명하고 있는 꿈'을 표현했다.

큐레이터 집단 '유능사'는 민중미술이 퇴조한 1990년대 이후 한국 미술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 유능사의 안대웅씨는 "1990년대 이래 한국 미술계는 폭발적으로 작업을 내놓고 있지만 그 에너지가 무엇을 향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미술의 궤적을 그리고 앞으로 도래할 흐름을 예측하는 시발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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