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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 식탁] 적셔 먹는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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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심야 식탁] 적셔 먹는 빵

입력
2017.11.22 04:4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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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딱딱하게 굳은 빵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그것은 빵을 만들어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아주 오래된 궁리다. 천운영 작가 제공
어떻게 하면 딱딱하게 굳은 빵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그것은 빵을 만들어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아주 오래된 궁리다. 천운영 작가 제공

카스텔라는 내게 아픈 사람의 음식이었다. 치유의 음식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몸이 약했던 내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속병이 따라오고, 병이 나면 며칠이고 곡기를 끊고 드러눕곤 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아픈 것만큼 불안한 일이 또 있을까. 그 적막한 공기. 꼼짝없이 누워만 있던 엄마가 내게 카스텔라를 하나 사오라 청하면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나을 차비가 되었다는 뜻이었으니까. 카스텔라 사러 가는 길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카스텔라를 콩알만큼 떼어내 따뜻하게 데운 보리차에 찍어먹었다. 몇 끼를 굶었으니 한입에 먹어치워도 모자랄 판에, 그 보드라운 것을 굳이 보리차에 담글 필요도 없을 텐데, 아기처럼 적신 카스텔라를 숟가락으로 떠서 우물우물, 반에 반쯤이나 겨우 먹고 다시 자리에 눕는 엄마. 마음이 아리면서도 나는, 일찌감치 식탐 많은 걸로 유명했던 나는, 그 옆에 앉아 간호하는 척하며, 남은 카스텔라를 야금야금 훔쳐 먹곤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카스텔라는 아픈 사람을 위한 빵, 딱 한번만 눈꼽만큼 티 안나게,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나는 왜 아프지도 않나, 카스텔라는 다 어디로 갔나, 씹을 것도 없이 녹일 것도 없이 사라져버린, 병약하게 달콤한 카스텔라.

이번엔 우유에 적신 식빵이다. 친구 집에서 프렌치토스트라는 걸 처음 먹었을 때를 기억한다. 평범한 식빵의 황홀한 변신이랄까. 맛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식빵일 뿐인데, 우유에 적셔 계란 입혀 지졌을 뿐인데, 프렌치라지 않은가. 프렌치토스트. 바게트니 크루아상이니 알 리가 있나. 프랑스사람들은 이렇게 먹는구나. 케첩은 케첩 대로 설탕은 설탕 대로 참 근사하게 맛있었다. 나도 해봐야지 프렌치, 토스트. 우유에 너무 오래 담가놓지 마. 식빵이 다 풀어지면 지지기가 곤란하거든. 친구가 대단한 비법이라도 되는 냥 팁을 알려줬다.

부활절 또리하(Torrija)를 사려 줄을 선 스페인 사람들. 천운영 작가 제공
부활절 또리하(Torrija)를 사려 줄을 선 스페인 사람들. 천운영 작가 제공

굳은 바게트를 와인에 푹 담갔다가 계란을 입혀 지져낸 스페인식 프렌치토스트도 있다. 또리하(Torrija). 빈자들의 디저트(Torrijas Pobre)라고도 한다. 우유와 버터와 크림을 듬뿍 넣은 화려한 프랑스식 디저트를 대신해 가난한 사람들이 만들어 먹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가볍게 설탕을 뿌려먹기도 하고, 꿀을 듬뿍 뿌려먹는 걸로 사치를 부리기도 한다. 부활주간(Semana santa)이 끝나고 나면 다들 또리하를 먹는다. 가난한 자들이나 부유한 자들이나. 또리하를 만들 바게트는 딱딱할수록 좋다. 그래야 모양을 유지하기 쉽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보드라운 질감을 만들 수 있으니까.

또리하(Torrija). 천운영 작가 제공
또리하(Torrija). 천운영 작가 제공

어떻게 하면 딱딱하게 굳은 빵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이것은 아주 오래된 궁리.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프에 담가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 양파스프나 크림스프 위에 튀긴 듯 구워낸 빵조각은 좀 귀여운 방식. 스페인의 마늘스프(Sopa de Ajo)는 전적으로 빵을 적셔먹기 위한 목표로 만들어진 스프처럼 보인다. 만드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올리브오일에 마늘을 껍질 채 넣어 튀기듯 구워 마늘기름을 낸다. 거기에 하몽이나 베이컨으로 고기냄새 좀 피워주고, 파프리카 가루(Pimienton Dulce)로 맛을 내고, 육수 넣고 끓이면 끝. 굳은 빵을 듬뿍 넣어 먹는데, 빵이 건더기 역할을 톡톡히 한다. 거기에 수란 하나 정도 띄우면 좋고. 그야말로 고기국물에 마늘 넣고 고춧가루 풀어 끓인 투박한 스프일 뿐인데 놀라울 정도로 맛있다. 정말이다. 게다가 마늘기름 덕분으로 다른 서양스프보다 뜨거운 상태로 제공된다. 뜨겁고 매콤하고 든든하기까지 한 마늘스프. 그건 다 굳은 빵 덕분. 굳이 한국음식에서 그 비슷한 걸 찾자면, 밥을 만 뜨거운 육개장 국물 정도?

아, 날도 추운데, 굳은 빵도 많은데, 마늘스프 한 냄비 끓여야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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