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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위 OK, 국민연금은 외면… 현대차 지배구조 ‘모범답안’ 물거품

입력
2018.06.04 04:4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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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순환출자 고리 해소 위해

2년여간 30여개 시나리오 검토

공정위와 교감 속 최적안 선택

“모비스 핵심 사업 AS,모듈 분리

주주 이익,합병 시너지에 의문”

2대 주주 국민연금 태도가 결정타

“지배구조 개선 기준 제시하려다

정부 스스로 자신 손발 묶은 셈

재벌 개혁정책에 타격 클 듯”

현대차 매장앞 시승차량들. 현대차 제공
현대차 매장앞 시승차량들. 현대차 제공

※편집자주 : 계층 간 양극화와 기업ㆍ가계 간 소득 불균형을 바로잡아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문재인 정부는 시장과 기업활동에 대한 규제 강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정교하지 않은 정책과 부처간의 부조화가 잇따르자 점점 기업들이 힘겨워한다. 이러다 정부의 공약 실현 실패뿐 아니라 자칫 성장동력도 식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온다. 기업을 멍들게 하는 ‘정책 실패’ 사례들을 유형별 3회에 걸쳐 점검한다.

현대자동차 그룹 주가는 지배구조 개편 논란을 겪은 후 곤두박질치고 있다.

3일 기업금융정보 분석회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배구조 개선안을 공개한 3월 28일부터 지난달 31일까지 현대차의 시가총액은 2조7,535억원이 증발했고, 모비스도 4조2,344억원 감소했다. 개편안과 연관된 주요 4개사에서 줄어든 시총은 9조2,003억원에 달한다. 현대차 그룹은 모비스 분할ㆍ합병과 대주주ㆍ계열사 간 주식 양수도를 통해 기존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는 개편안을 만들었고, 공정거래위원회도 개편안을 지지했지만 외국계 투자회사의 말 몇 마디에 개편이 좌절되면서 주가에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무엇보다도 글로벌 기업인 현대차그룹이 몇몇 외국계 펀드에게 굴복해 미래 청사진을 접었다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긴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3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지배구조 개편안을 전격 철회한 지 열흘을 넘겼지만,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금융투자업계가 내놓은 반대의견은 제각각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이어서 이들 요구를 모두 포용하는 개선안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현대차 그룹은 지배구조개편안을 마련하는데 2년 가까이 공을 들였다. 30여개 시나리오를 검토해 공정위도 합당하다고 평가한 안을 내놓은 것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지난해 8월 인터뷰에서 “현대차그룹 순환출자 구조 해소에 대해 현대차와 논의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공정위가 현대차 지배구조개편안 마련에 개입하고 있음을 공개했고, 개편안 발표 이후에는 “시장의 요구에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현대차 개편안은 정부가 중시하는 목표 중 하나인 ‘대기업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모범답안이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현대차 그룹을 통해 순환출자 구조 해소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다른 대기업 집단도 이를 참고하도록 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차 그룹의 개편안은 공개와 동시에 외국계 주주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첫 주자로 나선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은 현대모비스 분할과 현대글로비스 합병 비율이 부당하게 책정됐다고 주장하며, 직접 만든 안을 제시했다. 모비스와 현대차를 합병한 뒤 인적분할해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 안을 따르면 비금융지주회사가 현대차투자증권ㆍ현대카드ㆍ현대캐피탈 등 금융사를 자회사로 보유하게 돼, 금산분리를 규정한 공정거래법을 위반하게 된다.

이어 다른 기관들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갖가지 개선안을 쏟아냈다. ISS와 글라스루이스 등 해외 의결권자문사도 “모비스 분할 부분이 지나치게 낮게 평가됐다” “분할합병을 뒷받침하는 정보가 없다”“지주사로 전환하라” 등의 의견을 내며 반대했다. 현대차는 “합병비율은 당국도 문제 삼지 않았고, 합병에 따른 명확한 미래 사업계획을 공시 등을 통해 전했다”고 밝혔으나 반대의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해외 기관투자가는 의결권 자문사 의견에 따르는 경향이 높은데도, 외국인 지분이 48%에 달하는 모비스의 분할을 추진하면서 현대차 그룹이나 정부가 이런 저항에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부터 미숙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경제부처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외국계 펀드의 반대에 정부와 한국 대표기업이 협의해 추진하던 개편안이 좌절된 것은 정부 신뢰에 큰 상처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그래픽=강준구 기자

하지만 더 큰 문제는 2대 주주로 주주총회에서 개편안 통과의 열쇠를 쥔 국민연금(지분율 9.83%)이 정부의 핵심정책 실현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민연금과 자문계약을 맺고 있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모비스의 분할 목적에 대한 타당성은 인정된다”며 ISS를 반박하면서도 “신설 모비스의 입장에서 글로비스와의 합병에 따른 시너지가 명확하지가 않고, 기존 모비스의 핵심 사업부인 AS 및 모듈 부문을 떼어내는 것이 주주들에게 이익을 줄지 의문이다”며 개편안에 반대를 표했다. 그러자 외국계 펀드의 반대에는 주총진행 의지를 접지 않았던 현대차그룹은 결국 개편안 철회를 결정했다. 현대차 오너 일가 우호지분이 30.1%에 불과한 지배구조하에서 국민연금의 찬성을 확신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은 지난 정부 때인 2015년 의결권 자문사들의 반대 권고에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 의견을 냈다가 현 정부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어, 사실상 의결권 자문사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라며 “정부가 스스로 자신의 손발을 묶은 셈”이라고 말했다.

관가 안팎에서는 현대차 그룹 개편안 철회가 현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분석한다. 공정위 주도로 법무부, 금융위원회 등 전 부처가 기업집단 지배력 남용을 견제하고 공정거래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상장기업 전반에 지배구조 개편을 압박해왔으나, 정부와 함께 만든 개편안마저 좌절됐기 때문이다.

정부 기관 간 이견조율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만 옥죄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설익은 재벌 정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좌초된 것 아니냐”며 “정부를 신뢰해 지배구조 개편 정책을 그대로 따르다, 자칫 경영권이 약화해 단기 이익을 노리는 외국계 자본에 휘둘리는 처지가 된다면 누가 책임지겠느냐”고 되물었다.

박관규 기자 ac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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