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새삼스럽게 기억에 떠오르는 오래된 사건이 있다. 86년말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에서 M16 자동소총을 든 해병중사가 시외버스 승객을 인질로 잡고 18시간이나 군과 대치했던 사건이다.당시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고도 수십명의 인질이 다칠까봐 어쩌지 못하던 군은 결국 특전사 대(對)테러부대요원을 투입, 인질범을 사살하고 승객들을 전원 무사히 구출해 냈다. 기자들은 마치 영화장면과도 같은 이 기막힌 작전에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렇게 뻔히 현장을 지켜본 기자들 앞에서 군은 눈도 깜짝 않고 인질범이 자살한 것으로 공식발표했다. 말썽의 소지는 조금이라도 용납못하는 강박증과 방자한 권위의식의 표출이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이보다 앞서 84년 당시 전북 군산시 도심 한복판 관광호텔에서 수백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질극을 벌이던 군인 2명이 사살됐을 때도 역시 군의 발표는 자살이었다.
「관행」이 이러할진대 그많은 군내 의문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매년 400명에 달하는 군내 사망사건은 대부분이 자살, 혹은 본인의 결정적 잘못에 따른 사고사로 발표된다. 그 와중에서 머리와 양가슴에 3발이나 총탄을 맞은 시신도 버젓이 자살체가 되는가 하면, 밝고 쾌활했던 성격도 원래 우울하고 내성적이었던 것으로 바뀌어 부모, 형제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그러나 현장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유족이 반박증거를 찾아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유족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사망사건이 연평균 20여건이나 되지만 당초의 사인이 번복된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
군이 비판여론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것이 사기(士氣)문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진실과 상관없는 강요된 자부심이 사기로 착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군내 의문사에 대한 전면 재조사는 「진짜」 사기의 근거인 신뢰를 세우는 작업이다. 설사 몇몇 사인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인다해도 그건 민군관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피한 진통쯤으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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