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극은 전 세계 음악 장르 중 가장 힘이 있는 장르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아시아 대표 음악극으로서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이 말은 한국인이 아닌 싱가포르 연출가가 한 말이다. 링컨센터 페스티벌, 에든버러 페스티벌, 린츠 오페라 페스티벌 등 세계 주요 공연장과 축제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옹켕센 연출가다. 지난해 초연한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의 연출을 맡은 그는 한국의 전통 음악극에 반했음을 숨기지 않는다. 3,000년 전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 이국의 이야기는 우리의 소리만으로 무대와 객석을 가득 채운다. 불필요한 음악 요소들은 걷어내고 창극의 핵심인 판소리에 집중하는 콘셉트를 먼저 제안한 이도 옹켕센 연출가였다. ‘트로이의 여인들’은 지난 9월 싱가포르예술축제에 초청돼 싱가포르 관객과 평단도 매료시켰다. 내년 5월에는 영국 브라이튼 페스티벌과 런던국제연극제에 초청돼 유럽에도 진출한다.
창극을 비롯해 한국무용 등 우리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한 공연에서 외국인 제작진과의 협업이 늘고 있다. 전통예술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는 동시에 해외 진출에도 용이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여러 성과를 바탕으로 외국 스태프와의 협업은 꾸준히 증가할 전망이다.
대표주자는 국립극장이다. ‘전통에 기반을 둔 동시대적 공연예술 창작’을 목표로 하는 국립극장에게 해외 예술가와의 작업은 현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 중 하나다. 국립극장 전속단체인 국립창극단은 2011년 ‘수궁가’(연출 아힘 프라이어)를 시작으로 2014년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연출 안드레이 서반)을 무대에 올렸다. 국립창극단 관계자는 “외국인 예술가들은 한국적 미에 대한 편견이 없기 때문에 전통예술을 좀 더 자유롭게 재해석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연출가 서반은 춘향을 ‘사랑을 지키는 영웅’으로 해석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몽룡은 검사를 꿈꾸는 대학생으로 등장하고, 은퇴한 월매의 경제상황이 넉넉지 않아 향단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들과 협업으로 세계 무대에 진출할 가능성도 커진다. 국립무용단의 ‘회오리’(2014ㆍ안무 테로 사리넨)는 초연 직후 프랑스 칸 댄스 페스티벌 개막작에 초청됐고, ‘시간의 나이’(2016)는 프랑스 파리 샤요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데 이어 지난 10월 파리 크레테유 예술의 집 2017-2018 시즌 개막작으로 초청받았다. 2000~2016년 샤요국립극장 무용감독을 역임한 뒤 크레테유 예술의 집 극장장으로 옮긴 조세 몽탈보가 ‘시간의 나이’의 안무가이자 무대ㆍ영상디자인을 맡았다. 이 작품은 샤요국립극장에서 첫 회부터 매진을 기록하는 등 현지에서 높은 호응을 받았다.
국립극장 관계자는 “세계적인 공연예술가들의 네트워크가 좁은 편이라서 화제성 있는 작품과 단체에 대한 평가가 빠르게 파급된다”며 “작품성만 담보된다면 해외 예술가와 협업 작품은 해외진출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 작품에 대한 관심이 한국 공연예술 전반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다른 작품들에 대한 호평으로 국내 창작진이 만든 국립무용단의 ‘묵향’도 해외 주요 축제로부터 초청 제안을 잇달아 받고 있다.
여러 장점들을 주목한 국립국악원은 2001년부터 해외 음악가를 국내 초청해 국악 작곡법 등을 제공하는 ‘국제국악연수’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연수의 결실로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은 지난 10월 미국 ‘퍼시픽 림 뮤직 페스티벌’에서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 5인과 이건용 작곡가가 만든 국악관현악ㆍ실내악 6곡을 연주했다. 지난 2일에는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를 통해 국내 관객들에게도 음악을 들려줬다. 이번에 작업한 미국 작곡가들은 조지 루이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시후이 첸 라이스대 교수 등 미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음악가들로 3년 전부터 한국을 찾아 국악을 배우고 연구했다.
2일 국립국악원의 국내 공연을 위해 자비를 들여 한국을 찾아온 첸 교수는 “음악의 기술적인 부분보다도 한국 전통이 가진 고유의 문화를 이해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며 “악기의 음색, 악기가 쓰인 배경 등 문화적 맥락을 이해해야 음악 재료들을 통해 예술가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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