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D장조’를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유주얼 서스펙트’급의 반전을 기대해도 좋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음의 여운이 사라진 뒤 20여명의 학생에게 감상평을 물었다. “웅장하다”는 표현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 거대한 몸집으로 화려한 악상을 펼친다는 것이 중평이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갈만치 묘한 쾌감을 느끼며 마치 ‘카이저 소제’의 실체를 드러내듯 이 협주곡의 비밀을 발설했다. 그런데 어라,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조바심이 났다. “아니, 그 인간이 원래 절름발이가 아니었다니까.” 흥분하며 다시 누설하기를, “이 웅장한 협주곡이 사실은 왼손으로만 연주된 거라니까!”
수년 전 왼손만으로 된 이 곡의 악보를 처음 접했을 때 양손으로 나눠 치고 싶다는 발칙한 욕망이 솟구쳤다. 피아니스트에게 왼손은 천덕꾸러기와 같다. 오른손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유능한 주인공이라면 왼손은 그늘에 가려진 우둔한 조연이다. 그런데 이 협주곡은 천덕꾸러기 왼손이 극 전개의 모든 것을 관장해야 한다. 저음역에서 번쩍, 고음역에서 번쩍, 이리저리 날뛰자니 몸뚱아리의 균형이 와해될 지경이다. 오른손의 조력을 갈망한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명 피아니스트 코르토는 이 곡이 초연되기도 전에 악보를 입수하고는 양손을 위한 버전으로 편곡해버린다. 작곡가는 노발대발 격노했다. 출판도 연주도 금지시킨다. 코르토가 이를 무시하며 연주를 계속하자 라벨은 파리의 지휘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간청한다. “코르토와 절대 협연해주지 말 것!”
협주곡은 본디 ‘경쟁’과 ‘협동’이라는 이원적 가치를 설파하는 장르이다. 콘체르토의 어원인 ‘concertare’마저 이원적인데, 라틴어로는 ‘싸우다, 경쟁하다’란 의미지만 이탈리아어는 ‘조화시키다, 동의하다’란 뜻을 갖는다. 음량과 음색이 확연히 다른 두 개의 음향체, 즉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는 동적인 제1주제나 서정적인 제2주제로 차이를 드러내는가 하면, 빠름-느림-빠름 등 악장 간 템포 대비 등의 외부 장치를 통해서도 이원적 가치를 강화해왔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에서 오른손의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왼손의 엄지 손가락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한 손의 결핍을 감쪽같이 감추는 영리한 장치는 저음역과 고음역의 광활한 사용이다. 단 2마디 동안 무려 7옥타브를 직활강할 때도 있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피아노 의자 한 귀퉁이를 오른손으로 꽉 지탱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피아니스틱한 실마리가 곳곳에 주어져 있지만, 양손의 활용에 비하면 영 못미덥다. 라벨은 왜 이 웅장한 협주곡을 왼손으로만 연주하라고 했을까.
작곡가의 절친이었던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두 살 터울 형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중 큰 부상을 입고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연주자를 위해 동료 작곡가들이 팔을 걷어 부쳤다. 라벨 외에도 브리튼과 슈트라우스, 힌데미트와 같은 당대 작곡가들이 그의 왼손을 위해 여러 작품을 헌정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중 라벨의 곡을 가장 즐겨 연주했다.
이 협주곡을 들을 때면 왼손의 신경이 끊어져 피아노를 그만둬야 했던 같은 과 친구가 떠오른다.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차라리 오른손을 다쳤어야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왼손을 위한 작품들은 비트겐슈타인 덕에 풍부하나 오른손을 위한 곡은 상대적으로 드물었기 때문이다. 젓가락과 연필 잡는 법을 새로 익히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디냐며 씁쓸히 자족하던 그녀는 전공을 바꿔 스스로 작곡가가 되었다. 작곡과로 떠나는 친구에게 그때 차마 발설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던 바람이 있다. 그녀의 ‘오른손을 위한 협주곡’을 듣는 것. 어느덧 훌륭한 작곡가로 성장한 친구에게 이제라도 수줍게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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