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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 흘러…'붉은악마 키즈'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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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 흘러…'붉은악마 키즈'가 온다

입력
2014.07.0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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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악마 부모 사이서 태어난 아이들 ‘축구사랑 DNA’ 품고 무럭무럭 성장 브라질 월드컵 실패 속 ‘위기’ 말하지만 축구 즐기며 자라난 아이들은 ‘희망’ 노래

'붉은악마' 출범 초기인 1997년의 응원 장면. 세월이 흘러 이들은 어느덧 한국 사회의 '허리'를 구성하고 있다. 한국일보 DB
'붉은악마' 출범 초기인 1997년의 응원 장면. 세월이 흘러 이들은 어느덧 한국 사회의 '허리'를 구성하고 있다. 한국일보 DB

대한민국 축구 국가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경기를 앞두고 붉은 악마 소모임 회원 20여 명이 모인 서울 신사동 인근의 한 식당. 붉은 악마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이 맘 때면 비장함 혹은 기대감이 가득했던 이 자리엔 이제 시끌벅적 한 아이들의 웃음 소리, 그리고 그들의 엄마 아빠가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풀어놓는 세상 사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붉은 악마도 한 세대가 흘렀다. 1995년 PC통신 모임을 토대로 태동한 붉은 악마는 올해로 스무 해를 맞았다. 혈기 왕성하던 청년들, 소녀들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 어느덧 아버지, 어머니가 됐다. 30대, 40대가 된 그들은 어느덧 이 나라의 든든한 허리를 맡고 있다.

그 사이 그들의 자녀들은 낙엽이 붉게 물들듯 ‘붉은악마 키즈(Kids)’로 성장했다. 어딘가에 가입 신청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붉은 악마라 칭하지 않아도 그들은 붉은 악마가 됐다. '붉은악마 DNA' 그 자체만으로도 신청서요, 명함이었다.

◆’붉은악마’ 키즈가 온다

붉은악마 회원인 임은희(43·회사원)씨는 최근 딸 아영(·10·발곡 초등학교 4학년)이가 던진 말에 깜짝 놀랐다. 몇 달 전 아영이가 "학교에서 축구를 하고 논다"고 지나가듯 던진 말에 '요즘은 여자 아이들끼리도 축구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의 생각은 보기 좋게 틀렸다. 알고 보니 남자 아이들 사이에 홀로 끼어 축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잠시 기가 막혀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내 웃음이 나왔다. 아이에게서 '붉은악마 DNA'를 확인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붉은 악마 활동을 하다 남편 장주호씨(47·회사원)와 만난 임 씨는 2002년 4강 신화를 품고 사랑을 키웠고, 이듬해 결혼했다. 그 다음 해에 낳은 아이가 바로 아영이다.

붉은 악마 삼촌·이모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영이는 지금까지 꾸준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모임에, 경기장에 따라 나온다. 덕분에 벌써부터 붉은악마 삼촌들과의 추억도 많고, 그 곳에서 만난 친구, 동생들과의 유대 관계도 돈독하다.

임 씨는 "붉은악마로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도, 강요도 안 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아이의 축구 사랑이 신기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니 또래 다른 친구들보다 어른을 대하는 데 대한 자세나 친구들과의 소통 능력도 성장해 있었다는 것이다.

붉은악마 회원인 부모 사이에서 '붉은악마 키즈'로 성장하고 있는 장아영(10)양.
붉은악마 회원인 부모 사이에서 '붉은악마 키즈'로 성장하고 있는 장아영(10)양.

임 씨는 이어 "아이의 자존감도 덩달아 커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아영이가 아직 어리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사위를 만나 3대가 함께 응원하는 모습도 조심스레 그려본다"며 웃었다.

◆K리그 팬의 삶? 원한다면 무조건 OK

그 옆에선 또 다른 '붉은악마 키즈'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2002년 같은 모임에서 만나 2007년 결혼에 성공한 유재영(35·회사원)-임수영(32·회사원) 부부의 아이 찬우(5)와 준우(2)였다.

찬우는 식당 한 쪽에서 실컷 떠들다 게임을 시켜달라며 조르고 있었고, 준우는 엄마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붉은악마 삼촌·이모들은 안아주고, 놀아주길 자처했다.

찬영이와 준우를 두 손에 않은 유재영 씨는 "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최근 몇 년간 경기장엔 못 갔지만 이제 데리고 다닐 때가 됐다"며 또 다른 '붉은 악마 키즈' 탄생을 예고했다.

경기도 용인에 거주하는 그는 "집과 가까운 K리그 수원 삼성의 경기를 자주 보러 가는데, 자녀가 서포터즈로 활동하겠다고 하면 적극 지원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내 팀을 갖고 살아 갈 때 인생이 더 즐겁고, 멋질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10대 때부터 활동한 후 어느덧 나이 40을 앞둔 정기현(38·회사원) 붉은악마 대외협력팀장 역시 같은 모임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8살 난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는 "50~60명이 모인 이 모임 내에서만 무려 3커플이 결혼해 자녀까지 낳았다. 다른 모임까지 폭을 넓히면 훨씬 많은 사례가 있다"면서 '붉은악마 키즈'의 성장에 주목했다.

'붉은악마 키즈' 뿐만 아니다. K리그 서포터들의 아이들도 클럽을 향한 애정을 품고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 K리그 수원 삼성의 열혈 서포터인 김일두 씨, 대전시티즌의 오랜 동반자인 함태훈 씨는 각각 첫 아들의 이름을 '김수원' '함대전'으로 지으며 자긍심을 심어줬다.

◆희망의 새싹이 자라난다

프로축구 대전시티즌의 팬 함태훈 씨의 아들 함대전(왼쪽)군과 수원삼성의 팬 김일두 씨의 아들 김수원 군.
프로축구 대전시티즌의 팬 함태훈 씨의 아들 함대전(왼쪽)군과 수원삼성의 팬 김일두 씨의 아들 김수원 군.

2014 브라질 월드컵 본선, 태극전사들의 원정 첫 8강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1무 2패.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당시의 성적과 같다. 20세기로 돌아간 한국 축구의 월드컵 성적표를 바라보며 축구계에서는 벌써부터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한국 축구가 위기라는 평가가 또 한 번 나온다. ‘흥행 보증 수표’였던 A 매치 경기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곁에 있는 K 리그는 TV에서 틀어주는 먼 나라 축구에 밀려 국내 축구 팬들조차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절망을 말하기엔 이르다. ‘붉은악마 1세대’들이 첫 발을 내디뎠던 황무지는 어느덧 질 좋은 토양이 됐고, 그들은 그곳에 씨앗을 뿌렸다. 비록 넓진 않지만 오랫동안 잘 다져진 그 땅에 뿌리를 내린 ‘붉은악마 키즈’들이 자라나고 있다. 위기 속 한국 축구의 작지만 큰 희망이다. 김형준기자 mediabo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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